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165

로마인들의 변화

로마인들의 변화 로마인들의 생각에도 점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신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비인격적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직접 함께하시며 대화에 응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주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어요. 우리가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 안에 함께 하시지요!"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순수한 믿음은 박해당하는 상항에서 더욱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주님도 이미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이 고통받는 신자에겐 의연해지고 담대해지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통받는 기독교인이 모습은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을 자신의 죽음으로 전한 것입니다. 수천 명의 관객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순교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①

박해 속에서도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① 박해로 인해 기독교는 전멸될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핍박 속에서도 기독교인은 더 늘어났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죠. 우릴 늘 지켜 주셨어요!" 비기독교인들은 외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비웃고 핍박했지만 로마임들은 지중해 일대에 퍼져 있던 유대교에 감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 중에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믿겠다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중엔 실제로 유대교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할례 등 까다로운 규례로 인해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 재정적인 후원을 하는 선에서 만족했습니다. 유대교에선 이러한 이방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박해에 견디는 성도들

박해에 견디는 성도들 기도교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버렸습니다.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서머나의 원형경기장에 처형될 때였습니다. 당국자들은 폴리캅의 시종을 고문한 끝에 노년의 폴리캅을 체포했습니다. 총독은 폴리캅이 마음을 돌이키길 바랐습니다. "늙은 그대를 욕되게 하고 싶지 않소. 예수를 저주하시오. 그러면 살게 해 주겠어요!" 그러나 폴리캅은 단호했습니다. "난 86년간 그리스도를 섬겼지만 그분은 내게 단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소.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배반할 수 있겠소!" 결국 폴리캅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순교하고 말았습니다(A.D. 155). A.D. 150년경부터는 일단의 기독교 학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자들과 맞서기 ..

로마의 황제 숭배

로마의 황제 숭배 로마 제국의 영토는 매우 넓었고 온갖 인종들과 언어들이 섞여 있는 아주 복잡한 사회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한데 묶어 놓고 통치할 수 있을까가 로마가 안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황제 숭배였습니다. 그것은 제국 정책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각 지역에 황제를 모시는 신전이 건축되었으며, 제국 국민들은 황제 숭배가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이것을 거부하는 행위는 국가 질서를 깨뜨리는 반역죄로 낙인찍혔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주와 하나님이란 호칭을 받기 원한 도미티안 황제는 거거서 더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합니다. "유대인들의 성전이 사라졌으니 십일조는 황제에게 바쳐라!" 유대인들이 크게 반발하자 도미티안은 유대교의 관행을 금지시켰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단절과 황제 숭배의 발흥​

유대교와 기독교의 단절과 황제 숭배의 발흥 ​ 이 사건 이후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완벽하게 단절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도망이 아니라 계시를 받아 피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더 이상 비극적인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제외한 기독교와 그 외 세력들을 모두 회장에서 몰아냈습니다. A.D. 90년경 바리새인들이 주축이 되어 "얌니아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들을 저주한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이란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토해냈습니다. 먼저 단절을 선언한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말했습니다. "메시아를 죽인 원수들! 유대교 전통을 고집하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

유대인의 반란과 종말

유대인의 반란과 종말 A.D. 50년경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모여 유월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성전보다 높은 곳에 있던 한 로마 병사가 유대인 쪽으로 엉덩이를 내밀며 조롱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룩한 성회를 모욕하는 일이었습니다. 급기야 성전에 모여 있던 유대 군중은 큰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곧바로 로마 병사들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3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A.D. 64년에 플로루스가 유대를 다스리기 시작했고, 그가 통치한 동안에 유대인 지도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특히 그는 유대교를 모욕했고 성전의 기물들을 훔쳤습니다. 그는 심지어 병사들을 시장으로 보내..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 ​ 네로의 광기는 그렇다 치고, 우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의문이 듭니다. 과연 로마 시민들은 다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왜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로마인들의 잘못된 정보가 아주 큰 오해를 낳았던 것입니다. 일단 헛소문이 퍼져나가면 그것은 더 크게 부풀려지고 멈추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마친 뒤에 하는 성만찬 예식에선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교제함이.." 사람들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형제, 자매란 호칭은 당시 애인..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작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작 그러다가 A.D. 64년 로마에 일어난 대화재가 상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원인 모를 화재가 로마시에 일어나 6일간이나 도시 전체가 타버렸습니다. 혹자는 네로 황제가 원인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도시의 절반이 넘는 행정구역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화재의 원인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호재 소식을 들은 네로 황제는 급히 로마로 돌아와서 불길을 진압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긴급하게 소방대를 조직하여 화재 현장에 투입했고, 이재민이 된 수천 명의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정원을 개방하여 기거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최대한 민심을 얻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도시를 재건하려고 할 때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네로가 잘못 통치해서 화재가 난 거야! 황제가 ..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다

복음이 급속히 전파되다 초대교회를 시작으로 1세기 중반까지 교회의 확장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 속했던 모든 지역의 도시들은 통일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복음은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대다수가 헬라어(고대 그리스어)를 쓴 것이 아주 주요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전 유럽과 그 너머 지역에까지 흩어져 살았으므로, 기독교 선교사들은 그들을 통하여 쉽게 이방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최초 기독교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 그들은 복음전도의 중심지로 유대인 회당을 이용했습니다. A.D. 50년경만 해도 로마 시민들은 특별히 기독교인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내부적으로 크게 다투고 있었..

바울의 로마행과 순교

바울의 로마행과 순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을 거치고, 로마 총독 벨릭스에 의해 가이사랴에 2년간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고, 로마 시민인 관계로 바울은 직접 황제에게 항소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을 떠나 배를 타고 제국의 수도 로마를 향해 갑니다. 가다가 광풍을 만나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로마에 도착해서는 2년간 재판을 기다리면서 한 셋집을 얻어 가택연금 상태로 살았습니다. 이 기간 그는 옥중서신을 기록합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에게 쓴 편지입니다. 후에 무죄 선고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A.D. 64년경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후에는 더 이상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박해 당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