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

예림의집 2021. 9. 13. 21:49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

네로의 광기는 그렇다 치고, 우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의문이 듭니다. 과연 로마 시민들은 다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왜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로마인들의 잘못된 정보가 아주 큰 오해를 낳았던 것입니다. 일단 헛소문이 퍼져나가면 그것은 더 크게 부풀려지고 멈추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마친 뒤에 하는 성만찬 예식에선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교제함이.." 사람들은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형제, 자매란 호칭은 당시 애인들끼리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모임을 아가페라고 불렀는데 그 말도 성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신자들은 만나서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곤 했는데(로마서 16:16), 이것도 로마인들에겐 큰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 입장에선 예배를 참석할 수도 없으니 오해를 풀 길도 없고, 오히려 저질스러운 상상력들이 더해져서 미움과 증오심만 증폭되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헛소문 가운데서도 로마 당국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구별된 생활 태도는 로마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로마인들이 보기엔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신을 부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인이나 로마인은 생활 속에서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대지의 신, 비의 신, 바다의 신과 인간의 출생이나 죽음을 주관하는 신 등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신앙고백에 이교도들은 극단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보통 이교도들은 식사할 때 습관적으로 신들에게 술과 기도를 바치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따를 수 없는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레 이교도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리고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혈투를 기독교인들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먹고사는 문제도 힘들었습니다. 이교도의 의식에 사용하는 물건은 만들지 않았고 심지어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방 신들의 문화가 가득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들은 당시 로마법과 많이 부딪혔습니다. 신자들은 바울의 말대로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라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로마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로마법은 노예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금했고,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노예, 여자, 남자를 다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노예를 소유했던 일부 신자들도 교회 안에서는 노예가 다른 이들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유아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로마 가정의 남편들은 낳은 아기들을 버릴 권한까지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는 버려진 아이들을 부랑자들이 데려가거나 짐승들에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런 남편을 만난 여자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기독교인의 성과 결혼에도 나타났습니다. 당시 로마의 성적 타락은 최악이었으며 결혼 생활의 문란함도 대단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기독교는 경건한 생활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로마 시민들에겐 매우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회에서 새로운 것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인들이 보았을 때 기독교인은 제사도 드리지 않고 유대교처럼 오래된 성전도 없고 신성한 도시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A.D. 69년경까지도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을 기점으로 두 종교는 점점 멀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