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 고든/요한복음 22

참 빛요한은 계속해서

참 빛 요한은 계속해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1:9). 그 당시 요한이 보기에 세상에는 거짓 빛들이 많았습니다. 그 빛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세상은 마치 늪지와 같이 질척거렸습니다. 저지대의 늪지는 늘 습하고 공기도 항상 눅눅하며 햇볕도 잘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 늪지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음침한 곳으로 더 빠져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늪지에서 마술에 홀린 듯 희미하게 비추는 빛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습니다. 사람들은 늪지에 대해 잘 안다고 자랑하다가 정작 늪지에 들어오며 희미한 빛을 따라가면서 모두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 희미한 빛은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도 정작 ..

목표로 삼아야 할 한 가지

목표로 삼아야 할 한 가지 이어서 사도 요한은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더 강조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7). 사람들은 자기만의 생각을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빛으로 일정하면서 어떤 고난과 역경도 불사하고,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배우고 일하며 기술을 익히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며 그것은 마치 순금과 같이 귀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 삶은 이미 목표를 상실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약간의 빵과 땔감과 허름한 옷을 준다고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에..

잊힌 설교자

잊힌 설교자 요한은 이어서 간략하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한복음 1:18). 이 구절은 참으로 흥미로운데, 본문은 세례자 요한이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려는 것은 전문적인 일이나 학문적인 업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빛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칫 세례자 요한을 빛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한 남자가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매우 더웠고, 길에는 먼지가 가득했습니다. 그는 지쳤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길 옆에 있는 우물가로 갔습니다. 물은 아주 맑고 시원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 우물 옆에 남겨 놓은 줄이 달린 양철로 만든 그릇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

살아있는 순교자들..③

살아있는 순교자들..③ 요한이 사용한 "증언하러 온 자(witness)"란 말은 영어에서 "순교자"라는 뜻을 갖습니다. 순교자는 자신의 생명을 진리를 위해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맞습니다. 순교의 자리에서 점점 다가오는 위기를 느낄 때 우리는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평안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고통의 순간이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순교의 영웅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자리에 믿음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힘든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순간의 용기로 순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와 더 기나긴 고통의 시간들을 감내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

살아있는 순교자들..②

살아있는 순교자들..② 자, 아제는 말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입을 열어 여러분이 아는 것을 온유하고 담대하고 솔직하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라 삶이 말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위대한 증언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을 다 말하고 나면 이제 조용히 들으십시오.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책에 의존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전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큰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의 믿음 자체를 고민하거나, 어떤 책이나 관념의 도움을 얻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키울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습니다. "..

살아있는 순교자들..

살아있는 순교자들.. 순수한 열정을 가진 광야의 한 수도자가 증인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요한복음 1:7).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증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증언이란 세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첫째는 증인이 무언가를 안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증인이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증인은 자신의 삶으로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삶으로 말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증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증인이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는 위 세 가지 요소가 완전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려는 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언하려는 더 위대한 증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증인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

다시스 또는 니느웨?

다시스 또는 니느웨? ​ 요한은 이어서 두 번째 문단을 썼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요한복음 1:6).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 사람을 도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가가시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성경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러 세상에 오실 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걸으셨던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그런 흔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는 하나님의 발길이 닿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가슴에서 머리로..

가슴에서 머리로.. 이어서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 고대 영어에서는 "깨닫다"는 "붙잡다"와 "이해하다"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해한다"는 정신으로 마음을 잡은 상태를 의미하고, "붙잡다"는 손으로 무엇인가를 잡는 신체적 개념이 강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비록 우리가 대단한 명민함을 갖추고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뜻을 아주 조금 알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을 붙잡을 수 있을 ..

함축적인 말

함축적인 말 요한은 아주 간단한 말로 조용히 말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요한복음 1:5). 요한은 이 짧은 말에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에 피조 세계의 모든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요한은 창조의 시간부터 예수님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실 때까지의 모든 역사를 한 마디로 압축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참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속에서 나타나지 않으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해야 할 일을 깨달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참하나님을 만난 후, 다메섹으로 달려가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열왕기상 19:11-21). 만약..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 이어서 요한은 다음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두 분은 함께 계시면서 함께 일하셨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역자이며 친구였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지고 만물이 시작되었으며, 그분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성경을 꼼꼼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요한복음과 창세기의 시작 부분이 유사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두 책은 처음에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에"는 창세기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요한복음의 "태초에"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며, 세상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창세기에서의 "태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