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з하나님께로..ε♡з/한절 묵상 412

매임의 유익

매임의 유익 믿음은 우리의 상식과 현실 상황을 초월하게 한다. 믿음은 상식에 따라 살던 우리로 하여금 상식을 초월하여 살게 하는 힘이다.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미움과 반대에 부딪히고 결국 옥에 갇히기까지 된다면, 당연히 복음전도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바울은 옥에 갇혀 매인 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되었다고 간증한다(빌 1:12). 바울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상황에 따라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전하는 말씀은 단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전에 그 자신을 초월적으로 살게 하는 자유의 능력이었다. 그가 자유롭게 되니 그가 전하는 말씀이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복음의 능력은 그의 매임으로 더 강력하게 드러난 것이다. 육..

욥기 12장 13절

욥기 12장 13절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계략과 명철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욥이 말한 것은 그분의 지혜와 권능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욥의 속내는 자신을 파괴하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권능으로 죄를 심판하기도 하시지만,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죄인을 구원해 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도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은 택하신 백성을 친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욥기 11장 14절

욥기 11장 14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소발은 욥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죄" 때문이라 단정하고 회복을 위해 죄악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합니다. 물론 통렬한 회개가 회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듯, 회개가 모든 고난의 해결책도 아닙니다. 고난에 담긴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회개하면 고난이 쉽게 해결된다는 식의 접근은 자칫 하나님 뜻을 오해하고 형제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 10장 20-21절

욥기 10장 20-21절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간절함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입니다. 욥은 죽기 전 잠시나마 평안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버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의 기도는 절박하지만 옳은 기도는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괴롭히시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자신을 내버려 두시는 것이 평안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욥의 간구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맙니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욥기 10장 2절

욥기 10장 2절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욥은 자기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변론하기 위해 그분을 법정에 세우려 합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하나님은 피고가 아니라 공의로운 재판관의 자리에 앉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조차, 사람은 다만 죄인일 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성도에게 복이 있습니다.

욥기 9장 29절

욥기 9장 29절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욥은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유죄 판결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정직한 삶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이들의 수고가 전부 헛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욥이 두려워한 것은 자기 억울함을 밝히지도 못한 채 고난 중에 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욥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용기마저 잃고 맙니다. 하지만 의로운 고생이 정말 헛된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욥기 9장 15, 22절

욥기 9장 15, 22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인간의 불의함에 대해 수긍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은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의 준엄한 심판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은총을 비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고서도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합니다. 고백이 머리에서 내려와 가슴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평안은 머리와 가슴이 만나 함께 "아멘"으로 화답할 때 찾아옵니다.

욥기 8장 11-12절

욥기 8장 11-12절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빌닷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람은 물에서 멀어진 왕골이나 갈대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욥의 절규가 믿음 없는 소리라는 비난이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의심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권면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도 믿음이 없으면 결국 헛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로마서 1:17).

욥기 7장 17-18절

욥기 7장 17-18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4)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이 너무 커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욥과 다윗의 고백은 닮았지만, 욥의 말은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냉소와 항의였습니다. 욥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은 그분 백성이 고통당할 때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예레미야 31:20). 하나님의 아파하심이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