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 3275

바울의 2,3차 선교 여행

바울의 2,3차 선교 여행 이어서 바울은 이번엔 실라와 함께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는데 이전에 세웠던 교회들을 우선 방문했습니다(51-54년경). 소아시아의 서부를 지나 드로아에서 유럽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을 때는 난생처음으로 유럽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북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여행하여 이윽고 서양 문화의 발상지인 아덴(아테네)에 이릅니다. 복음 전도 여행은 힘든 행로였지만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갔을 때엔 상당한 규모이 기독교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반 후에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2차 선교 여행 때 둘러본 곳을 다시 방문했으며 무..

바울의 1차 선교 여행과 1차 예루살렘 공의회

바울의 1차 선교 여행과 1차 예루살렘 공의회 A. D. 50년경 바울은 바나바, 마가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떠나 구브로와 소아시아 지역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있을 때엔 유대주의자와 심하게 다투기도 했습니다. 율법은 1세기 유대인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계속되었던 갈등의 핵심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교에 젖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말하길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추가적으로 유대의 율법을 다 지켜야 돼. 안 그러면 그건 신앙이 아니야!"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에겐 불가능한 요구요. 만약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위대한 사람일 거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순 없소!" 인간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려고 한..

소명과 가치관의 발견

소명과 가치관의 발견 사람은 누구나 한 세상을 살면서 두 가지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나는 무구인가?"라는 물음이고, 둘째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물음입니다. 평생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이성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또한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가치관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어는 집 개가 "나는 개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이미 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직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의 정체성과 "나는 이 일을 위해 산다"라는 가치관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기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도가 된 바울

사도가 된 바울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로마 시민이었으며 그는 엄격한 바리새인으로서 정기적인 교육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배웠고, 예루살렘에 가서는 당시 석학이었던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 스승 밑에서 성실하게 수업을 받아 후에 유대인 최고 공의회인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의 따르면 다른 유대인 연장자들보다 유대교를 지나칠 정도로 믿고 따랐으며, 스데반 순교의 증인이 되었고, 그 후로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병사들과 함께 다메섹을 향해 가던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

구속에 대한 그릇된 현대신학

구속에 대한 그릇된 현대신학 슐라이어마허는 전통적 신학의 가르침을 떠나 구속을 죄와 사망에서의 속량이 아니라 예수가 갖는 무한한 신적 의식에 신자들을 수납하는 신비적인 의식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즉 구속을 구속주가 신자들을 자기의 행복에 수납하는 화해 행동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과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리츨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윤리적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기와 교제하게 하락하신다고 전제하고, 칭의를 죄가와 형벌의 제거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보지 않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한다는 죄의식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칭의의 결과 화해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객관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죄인의 주관적 변화로만 이해하는..

베드로에서 바울로..

베드로에서 바울로 사울은 본래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려고 했던 바리새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매우 신기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시작된 초대교회의 발전 과정에서 사도 베드로는 중심인물로 등장했습니다. 12제자 중에서 유다를 대신할 자를 세우는 일에도 제자들과 함께했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엔 주된 설교자로 활동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초대교회의 중심 사도로서 헌금 문제로 신자들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하였고 순회 전도를 하며 병을 고쳤고 설교와 안수를 하며 사마리아 전도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A.D. 44년경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예루살렘 교회를 공식적으로 박해할 때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후로 베드..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성령론과 선교의 상호 관계성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성령론과 선교의 상호 관계성 성령은 선교의 영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데이비드 왓슨은 사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속에 나타난 선교 명령은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하심과 즉각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헨드리쿠스 벌코프는 요 20:21~22를 근거해서 부활의 주님이 신약 교회를 탄생시키기 전에 성령강림을 약속하셨고 바로 이 바탕 위에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서 선교의 영으로서의 성령과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역임을 말한다. 칼빈도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하심과 중재하심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은총의 수단을 통해 개인이 구원받으며 성령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아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으로 ..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그리스도의 삽자가상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죄를 모두 담당하여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완전한 속죄 제사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로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지시했던 참 속죄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위한 속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 화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죄목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자기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이스라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되어 로마의 반역자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극악한 수치의 죽음인 십자가 처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은 죄의 저주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 대신 죽은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전 존재가 당하는 ..

요한복음의 구조를 설명하라.

요한복음의 구조를 설명하라. 요한복음은 표적과 증언의 듀얼모드, 즉 이중 배열 구조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의 수세 증언도 두 번이고, 신명기에서는 2, 3사람의 증인을 말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2사람이 증인으로 말하고 있다. 구조란, 다양한 종류의 설교를 하는 가운데 청중에 따라 원하는 설교의 패턴이 있다. 이것이 구조이다. 말하는 자가 청중 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려고 할 때 구조라는 그릇에 담는다. 그런데, 지금은 읽는 문화이지만, 그 당시에는 귀로 듣는 문화이다. 당시 헬라 문학은 반복해 주는 형태로 연설인 레토릭이 유행하였는데, 요한복음은 레토릭과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읽는 자로 하여금 두 번 이상 생각하게 함으로 그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한 것이다. 병행법, 역교차 구조, 삽입,..

청중을 사로잡는 설교의 삼중주 - 서평

청중을 사로잡는 설교의 삼중주 - 서평 김동영 항상 설교를 준비하다면 나는 이러한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청중들이 나의 설교를 들을 것인가? 현재의 교회에서 장년 오후 예배, 청년, 주일학교, 학생, 구역예배에서 설교를 하는 나는 비교적 동기 전도사들보다 많은 설교를 하면서 과연 내가 하는 설교가 성도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었다. 과서 우리는 삼 대지 설교를 배워왔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삼 대지 설교를 이용하여 설교하고 있고, 설교를 삼부분으로 나누지 않으면 왠지 설교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삼 대지 설교는 한국 강단의 표본으로 자리 잡아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젊은 목사님들과 유학파 목회자 중심으로 원 포인트 설교나 삼 대지 설교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