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성령론과 선교의 상호 관계성
성령은 선교의 영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데이비드 왓슨은 사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속에 나타난 선교 명령은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하심과 즉각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헨드리쿠스 벌코프는 요 20:21~22를 근거해서 부활의 주님이 신약 교회를 탄생시키기 전에 성령강림을 약속하셨고 바로 이 바탕 위에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서 선교의 영으로서의 성령과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역임을 말한다. 칼빈도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하심과 중재하심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은총의 수단을 통해 개인이 구원받으며 성령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아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영적인 유기체적 공동체인 교회가 형성이 되며 성령께서 교회의 영적 은사들을 직분과 더불어 수여하심으로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케 하심을 확신한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교회 부흥은 선교의 열매를 가져온다.
팩커는 하나님께서 부흥을 그의 교회에 허락하시는 주요 이유 네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교회를 갱신시키고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돼버린 교회를 긍휼히 여기심과 그의 백성들의 굳은 심령을 진리로 새롭게 하심과 특별한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폴히버트는 기도회, 성경공부모임, 전도, 선교 운동으로 시작되어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성령의 쏟아부어 주시는 부흥과 연관됨으로 전 교회적인 변혁과 사회 윤리 향상 및 세계적인 선교 운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내에 부흥의 의미는 샤머니즘과 세계관과 교묘히 혼합되어진 기복 신앙적이며 알미니안 신학이 바탕 되어진 프로그램화될 수 있는 부흥의 잘못된 개념. 부흥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부흥의 의미를 부흥주의로 규정하여 무조건 부흥을 부정적으로 보려 하는 경직되고 고답적인 교조주의적 경향이다.
성령의 일반 역사로서의 보통 은총은 선교의 예비적 토양을 마련한다. 찰스 핫지는 인간을 포함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성령께서 창조의 영으로서 통치하시고 섭리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보통 은총을 인간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부여하시는 은총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 만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의 계속적인 통치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보통 은총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특별 은총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보통 은총의 보편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보통 은총의 존재 자체가 핫지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며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은총이 선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지만 보통은 총 그 자체 안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려는 그 어떠한 신학적인 시도도 반정립 원리에 대한 성경 진리의 도전이요,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거부이기에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는 용납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보통 은총을 통한 선교의 접촉점이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선교의 담대함과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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