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з예림의집으로ε♡з/단장 칼럼 1999

인간의 사랑은 이중적이다..!

인간의 사랑은 이중적이다..! 인간의 사랑이 지닌 이중적인 면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관계 속에서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간혹 사랑을 주고받는 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이 같은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에 비해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는 위험성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따릅니다. 어떤 이들은 책임지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숨기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기 직전까지만 사랑합니다. 그러면서도..

수지 엄마와 운전기사 이야기..

수지 엄마와 운전기사 이야기.. 수지는 지금 자신이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고 느끼면서 방으로 들어가 숨은 채 위축되어 있습니다. 수지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엄마는 수지에게 빵 굽는 일을 좀 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수지는 엄마를 도와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엄마는 수지와 부엌에서 행복하게 수다를 떨면서 조금 전 수지를 화나게 했던 상황에 대해 이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수지는 금방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와 오히려 한층 성숙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승객에게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버스 운전기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침에 버스 운행을 하면서 화난 표정이나 부루퉁한 표정으로 버스에 오른 사람들이 다른 ..

서로를 책임지게..

서로를 책임지게.. 관계에서 대화는 서로에 대해 책임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격려하면서 그의 능력을 끌어내야 함은 물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혼자서 자신을 격려하면서 성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각 단원의 잠재력과 각 악기의 고유한 특성을 조화롭게 이끌어 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서 그런 잠재력과 능력을 이끌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지만 이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격려와 자극이 필요합니다. 아이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에게서 인격적인 정직한 반응과 결단을 이끌어 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이든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특히 상처에 억눌려..

대화를 통해 가르칠 때..

대화를 통해 가르칠 때.. 한편 아이들도 대화를 통해 가르칠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처럼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간혹 아이가 대화 속에서 부모의 권위에 대항한다 하더라도 이것 또한 아이 편에서는 대화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아이의 반응을 접할 때 부모는 아이가 자유를 위해서 저항하고 행동할 만큼 자립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아이에게 적당한 자유를 허용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부모와 자녀는 다음 단계의 성숙한 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의 대화란 이제 아이가 부모의 말을 하나의 조언으로 받아들여 삶에 적용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부모의 말을 지속적으로 행동에 반영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

관계는 대화이다

관계는 대화이다 관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반응할 때 일어납니다. 또한 대화는 둘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대화에서 상대방이 사라지면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 중 한 사람이 상대방과의 소통을 중단하거나 부부간의 대화가 사라지게 되면 결혼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무시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라는 대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여 ..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관계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엄마와 올바른 관계 속에 있지 못하거나 주변의 공동체가 우리를 책임지고 돌봐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기는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함으로 관계를 시작합니다. 아기와 엄마의 관계가 아무리 의존적이라 하더라고 해도 둘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는 젖과 사랑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아기에게 다가갑니다. 반면에 아기는 수시로 마음대로 엄마를 부릅니다. 아기는 엄마를 부르기 위해 울기도 하고 단순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그 요구에 응답하며 아기를 돌봐 줍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의존적인 관계에서도 아기는 잠을 자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울기도 하고 다정하게 속삭이기도 하..

관계 맺으며 살도록..

관계 맺으며 살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먼저는 하나님과 그리고 세상 만물과 이웃과 관계 맺으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인간'과 '관계'라는 단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한 사람은 결코 사람이 아니다'라는 옛날 로마 속담처럼 인간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중요한 관계로부터 단절된 경험이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관계가 단절될 때 우리는 행복함과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모임에서 환영받고 따뜻함을 느끼데 되면 우리의 삶은 다시 활력을 되찾고 마치 부활한 것처럼 다..

세상 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본다

세상 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본다 의외로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더 쉽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인다'라는 것은 성령 안에서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특별한 종교적 목적을 위해 모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믿는 사람들이 예배나 가르침을 세상 속에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모임은 오히려 이웃 살마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일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 섞여 있을 때

세상 속에 섞여 있을 때 이렇게 세상 속에 섞여 있을 때에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령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교제입니다. 또한 서로를 책임지며 사랑 안에서 돌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요한일서 4:20).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6:16).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난미을 만나 참된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원한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세우고 화려하게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분리시키려는 시도

분리시키려는 시도 한편 잘못된 하나님에 관한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다시 세상 밖으로 몰아내어 고립시켰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세속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순전하게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불신앙적인 세상 속에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양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과잉보호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내세를 지향하는 교회의 태도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일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