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з예림의집으로ε♡з/단장 칼럼 1999

부활의 참여함

부활의 참여함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에 신실하셨으며 순종함으로 그 사랑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 삶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며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주께서 주시는 해방감, 승리감, 새로워짐과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결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냉소와 우울이며 슬픔과 낙담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믿음과 정반대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 우리는 어떤 문제라도 심지어 인간적..

관계에서의 고통을 통해서..

관계에서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에서 겪게 되는 부정적인 일들로 인해 방어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구원보다 체면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회개하기보다는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추하고 죄악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춰진 영적인 갈급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관계에서의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사람들이 진정으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것처럼 많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면서 살마들을 판단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

Cat on a Hot Tin Roof

Cat on a Hot Tin Roof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 에 이러한 원리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장인물을 천하고, 불경스럽고, 부도덕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쉽게 간과합니다. 연극에서 아들인 브럭은 술에 취함으로 자신의 문제와 아버지와 아내와 일로부터 도망칩니다. 그의 아버지인 빅 대디는 거칠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걱정합니다. 그러다가 빅 대디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고 온갖 회피와 변명을 포기하고 아들에게 먼저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브럭은 이런 빅 대디를 좇아내었습니다. 아들의 거절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병들어 가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아들의 거부를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 사랑..

온전한 사랑의 의미

온전한 사랑의 의미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죽음을 통해 이후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삶이라면 이 땅에서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도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우리를 환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즉 완전한 순종으로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문제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욕구, 적절하게 타협하면서 일하고 싶은 욕구,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 자신의 길을 스스로 계획하고자 하는 욕구를 날마다 십자가 위에서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

십자가에 참여함..

십자가에 참여함..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그 말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가르침과 삶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삶처럼 환대할 수 없는 자를 환대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도 십자가만큼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없이 그러나 강력하게 요구하는 진리는 그냥 모른 척 눈 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진리와 요구를 위회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로맨스가 자신의 삶에 찾아오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에서의 온전한 사랑은 수많은 도전과 ..

예수님을 닮아가기

예수님을 닮아가기 그 답은 바로 다음의 위대한 계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 예수님은 우리의 이중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는 쉽게 흔들리는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다면 주께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실 때 의아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님이 오시자 베드로는 정말로 반석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베드로와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이러한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데 되었으며 지금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삶 속에는 인간 예수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선입니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인간의 완벽한 초상화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셨던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너무나 감동스러운 그림이어서 우리는 숨죽여 그것을 보고 싶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의 깊은 동정심과 인간적인 모습은 무디어진 우리의 마음과 가슴으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을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어떤 일을 하기 원하시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아름다움과 단순성을 깨닫는다면 주님의 계명에 대한 두려움은 멀리 사..

오늘날까지도..

오늘날까지도.. 그런데 이 사건이 율리우스 시저나 조지 워싱턴의 삶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다른 것은 오늘날까지도 그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의 능력이 인간의 생명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B. C. 와 A. D.는 단순히 연대를 나누는 기준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가운데 창조의 본성이 거대한 변화를 겪는 기준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생명에 나사렛 예수의 생명이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2000년 전 성령을 통해 사람의 생명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던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하나님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성령이 거주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세상 속으로, 즉 우리의 갈등과..

그리스도인의 교제

그리스도인의 교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로서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 자체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에 계속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려는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며, 양면성을 가진 인간의 사랑이나 선한 행위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관계의 근원은 성령의 임재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그분의 사역은 우리의 생명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갈등이 남아 있..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도 신뢰와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의 사랑에 반응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서 상처 입을 가능성도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사랑을 받을 만큼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그의 사랑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변심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에 조심스럽게 반응하며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에 사랑을 주는 사람도 상대방이 사랑을 거절했을 때 받을 상처 때문에 사랑하기를 주저하다 보면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