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 고든 356

1장, 주님을 본 자의 변화

1장, 주님을 본 자의 변화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그 모습을 절대 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본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변화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를 바라는 간절함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다시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서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갔습니다. 이때 사람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

S.D. 고든/영광 2022.12.06

행하면 알게 된다

행하면 알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구성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짧은 도입부(1:1-3)로 시작하고 이어서 요한의 인사가 나옵니다(1:4-8절). 그 뒤로 예수님의 환상과 주님이 요한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1:9-20). 주님은 위대한 모적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여 더 이상 죽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성도들과 함께 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 가지 내용을 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첫째, 요한이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 둘째,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셋째, 앞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2장, 3장).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로 올라가셔서 직접 눈으로 보신 장면도 이야기합니다(4..

S.D. 고든/영광 2022.12.06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놀랍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와 세속을 구별하는 경계선은 여전히 흐릿합니다. 아니,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 지경에 와 았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교회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은 전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도 않고 영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믿음의 증인으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목회자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에서 세상 사람들보다 추악한 행태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의 말씀도 자기 멋대로 해석합니다. 앞으로 어떤 끔찍한 결..

S.D. 고든/영광 2022.11.26

예수님의 호소

예수님의 호소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생명을 주신 예수님께 나아가고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고 진심으로 헌신하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화답하며 나의 모든 것을 내드릴 때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 됩니다. 다시 이 땅에 돌아오실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면 그분을 나의 주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 오기 전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현재는 "예수님의 승천"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의 중간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형식주의와 교묘한 타협으로 생각이 혼란하고 ..

S.D. 고든/영광 2022.11.26

구약과 신약의 앙상블 요한계시록

구약과 신약의 앙상블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언어는 꽤 흥미롭습니다. 사도 요한은 히브리적인 사고와 그리스적인 화법이 결합되어 있는 흔치 않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마치 히브리라는 영혼이 그리스라는 육체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면 육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요한계시록의 아이디어와 이미지는 대부분 구약 성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디어와 이미지는 히브리적이지만, 언어는 그리스적입니다. 학자들은 요한이 보여주는 그리스적인 언어가 요한복음에 사용된 그리스적 언어와 다르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문법을 적용해 히브리적인 사상을 더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구약 성경이라는 실을 가지고 신약 성경이라는 베틀로 새로운 옷감을 만들고 있는 것과 ..

S.D. 고든/영광 2022.11.26

예수님이 절친, 사도 요한

예수님이 절친, 사도 요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인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요한복음 1:35-42). 그날부터 예수님과 사도 요한의 돈독한 우정이 시작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시들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끈끈한 우정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요한이 특별히 잔정이 많거나 붙임성이 좋아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요한이 정이 많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성격이나 기질이 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했습니다. 단지 성격이 맞아서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서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

S.D. 고든/영광 2022.11.25

영광의 책, 요한계시록

영광의 책, 요한계시록 성경 66권 가운데 요한계시록은 "영광의 책"으로 손꼽힙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입니다. 우선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절정을 이룹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담긴 예언의 말씀들은 요한계시록이라는 저수지에 하나로 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에 쓰신 "면류관"에 관한 책입니다. 주님은 앞으로 왕국의 영역을 넓혀 갈 것이라고 요한에게 직접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가짜 주권자인 마귀를 몰아내고 온 땅을 통치하십니다. 여기서 다른 책들과는 구별되는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온전히 행사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에는 실패와 방황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한다는 ..

S.D. 고든/영광 2022.11.25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우리는 "아직(not-yet)"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지 아니하고, 주님은 지금도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분의 통치를 선택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천상에서는 더 이상 선택의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유일한 기회의 땅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주님을 삶의 보좌로 모실 기회는 오늘 이 자리밖에 없습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예로부터 아름답고 정교한 레이스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도 브뤼셀의 레이스를 보고 감탄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브뤼..

S.D. 고든/영광 2022.11.25

주가 주신 능력

주가 주신 능력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고 "교회의 머리"라는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에베소서 1:2-22). 마침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영적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는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의 경건한 삶까지 성령님께서 인도해 가시고, 면류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가 한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나라의 본부 역할에 충실하다면 ..

S.D. 고든/영광 2022.11.24

인내의 위대함

인내의 위대함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완전히 통치하시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브리서 2:8).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그대로 두시기 때문입니다.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사이의 "아직(not-yet)"이라는 간극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절부절못하며 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을 완전..

S.D. 고든/영광 2022.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