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з하나님께로..ε♡з/한절 묵상 412

욥기 7장 4절

욥기 7장 4절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욥의 절규는 믿음 없는 절망과 원망의 소리로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지금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의 절규는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대답에 어설피 타협하지 않고, 극심한 고통을 날것 그대로 버텨 내면서 하나님의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믿음의 외침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그렇게 치열하셨습니다. 지금도 피땀 흘리듯 치열하게 기도할 일이 내 안에, 그리고 세상에 참 많습니다. 졸 때가 아닙니다!

욥기 6장 15절

욥기 6장 15절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욥은 자신이 겪는 부당한 고난을 누군가 알아주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따뜻한 위로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알아준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형제라고 부를 만큼 가까웠던 친구들의 태도에서 욥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친구들이 보여 준 우정은 급하게 흘러, 필요할 때 길어서 쓸 수 없는 "개울의 물살" 같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요 사랑입니다.

욥기 6장 9-10절

욥기 6장 9-10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우리는 고난 속에도 주님은 계신다고 말합니다. 혹은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깊은 뜻"을 세상 사람들이 깨닫게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종종 잊곤 합니다. 이것을 잊은 채 건네는 위로는 "얼른 죽으면 좋겠다!"라는 욥의 반응처럼 듣는 사람을 격앙시킬 뿐입니다. 욥에게 필요했던 것은 섣부른 위로나 교훈이 아니라 묵묵히 곁을 지키는 무언(無言)의 이로가 아니었을까요?

욥기 5장 6절

욥기 5장 6절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이 구절은 "진실로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며, 진실로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아니며"와 "아니니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로"를 강조 보조사로 이해해 "진실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재난과 고난은 이간의 "유한성"과 관련됩니다. 우리가 완전한 존재라면 어떤 고난이 닥쳐오든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을 힘겨워하는 유한한 존재기에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감당할 힘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욥기 4장 2절

욥기 4장 2절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엘리바스는 밤낮 7일을 침묵하며 욥과 함께할 정도로 욥의 고난을 아파하며 공감했습니다(2:13). 그러나 욥이 고통 가운데 자기 생이을 저주하는 말(3장)을 듣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엽니다. 결국 욥을 위로하기보다 비난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쏟아 냅니다. 성도는 충고나 권면에 신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한 채 하는 인간적 충고나 권면은 자칫 "위로"라는 명목으로 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욥기 3장 20절

욥기 3장 20절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욥은 스스로 이해할 수 없기에 수많은 "어찌하여"를 쏟아 냅니다. 자신이 마주한 고난의 원인을 찾을 수 없기에 답답해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욥의 "어찌하여"는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는 "어찌하여"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빛을 주시고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그의 "어찌하여"에 초대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문제 앞에서 모든 일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욥기 3장 2절

욥기 3장 2절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지키던 욥이 마침내 입을 엽니다. 극심한 고난으로 인해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거칠고 조급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론 그의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탄식은 아닙니다. 자신이 겪는 극심한 고난에 대한 탄식이자, 흠 없이 경건하던 생애 앞에 갑자기 펼쳐진 깊은 어둠을 마주한 당혹스러움에 대한 탄식입니다. 성도의 경건은 "인내하는 욥"과 "조급한 욥" 사이 어딘가에 자리합니다. 나는 어디쯤 있습니까?

욥기 2장 4절

욥기 2장 4절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사탄은 또다시 욥을 참소합니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새 변역 성경)." 소유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생명의 위협에는 흔들릴 것이란 논리입니다. 사람은 소유를 확보하기 위해 생명을 저버리거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 소유를 저버립니다. 이 두 가지는 경건을 흔드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참된 경건은 소유와 생명의 문제조차 하나님 주권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욥기 1장 1절

욥기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욕기의 시작은 명확하면서도 불분명합니다. "..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라는 표현은 역사적 인물을 가리키거나(사무엘상 25:2) 가상의 인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사무엘하 12:1). "욥"이라는 이름은 "원수"라는 뜻과 함께 "인내하다, 회개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고난 가운데 있는 인간 실존을 암시합니다. 고난 앞에서는 평소 확신했던 모든 것이 흐려지거나 무너집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회개하며 인내하는 이에게는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

디모데전서 6장 17절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정함이 없다"라는 것은 "불확실하다, 가변성이 있다,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특징을 지닌 재물에 소망을 둔다면, 우리 인생도 재물에 따라 가변성이 있고 신뢰하지 못할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만 소용되는 것이기에, 다가오는 시대의 생명, 곧 영생(12절)을 취하기에 적절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영생"을 주시며 또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