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з하나님께로..ε♡з/한절 묵상 412

마태복음 3장 8,9절

마태복음 3장 8,9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이 종말의 심판에서 자신들을 지켜 줄 보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혈통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변화된 삶으로 믿음을 증명한 사람만이 심판에서 건짐 받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이 덧입힌 허울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힘껏 살아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5절

마태복음 2장 15절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입니다. 마태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애굽에 거하신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지낸 역사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오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죄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은총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온전한 구원의 시작과 완성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

마태복음 1장 19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유대인에게 혼전 임신은 종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금기였습니다. 이것을 어긴 사람에게 율법은 "죽음"으로 책임을 물었습니다(신명기 22:23-27). 따라서 요셉은 율법에 근거해 파혼할 정당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정혼자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대신 "가만히 끊는" 편을 선택하려 했습니다. 요셉이 보인 자비와 용서가 함께하는 새로운 차원의 의로움은 예수님에 의해 완성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류 역사에 새로운 문이 열렸음을 선언합니다. "계보"(헬, 게네시스)는 창세기의 헬라어 명칭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이야기가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이어짐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역사의 주인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요한삼서 1장 8절

요한삼서 1장 8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복음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의무나 빚을 지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음 전도자(선교사)로 헌신한 나그네들을 돕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이 일은 의무를 넘어 "기쁨으로" 감당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의 섬김을 진리를 전하는 영광스러운 동역과 동일하게 여기십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

요한일서 5장 1,4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는 남들보다 무엇 하나라도 뛰어나기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탁월함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불만일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한 가지라도 남들보다 특별하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교만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면 모자란 나와 너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

요한일서 4장 12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영생은 "언제"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용서하고 사랑할 때" 시작됩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영생과 천국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종종 상처가 덧나는 것은 우리 안에 용서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 싸매 주는 사람들" 안에 임합니다. 천국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 18절

요한일서 3장 15, 18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영생은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삶입니다.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물었던 율법 교사는 질문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형제)입니까?"라고 묻는 대신(누가복음 10:29) "누가 고통받는 자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어야 했습니다. 전자는 교만과 혐오를 낳는 질문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고서야 비로소 영생 얻는 길을 알게 됩니다(누가복음 10:36,37). 영생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자비를 베푼 이 안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9절

요한일서 2장 9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예수님이 주인 되신 공동체는 회개를 기뻐하고 서로 용서함으로 하나 됩니다. 또 징계를 통한 사랑으로 더욱 건실해집니다. 징계를 미움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징계는 형제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에 오직 겸손과 온유로만 행해야 합니다. 사탄은 의분을 가장한 감정싸움을 부추겨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미움에 사로잡혀 형제에게 내리는 징계는 사탄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사탄이지 영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6절

요한일서 1장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요한은 "만일 우리가..."(6,8,9,10절)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의 말을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독점한 것처럼 말하고 자신들을 죄에서 자유로워진 특별한 존재로 포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신비하고 독점적인 교통"을 주장하는 것으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따라 서로 사귀는 삶"으로 빛날 뿐입니다. 말이 아닌 행함의 빛이 어둠을 물리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