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 고든 356

자유로운 항복

자유로운 항복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순종"이라는 말을 좋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 단어는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거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그 짧은 말씀의 첫 번째 단어인 "메라"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날카롭고 거친 음성으로 "이리로 와서 나에게 굴복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만약 원한다면, 너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자유롭게, 그리고 쾌활하게 멍에를 메라."라고 요청하십니다. 군대에서의 항복은 강제된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순종이란 자유로운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자유로운 항복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만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유롭게 기쁜 마음으로 바쳐..

S.D. 고든/섬김 2021.01.20

삶의 법에 대한 항복

삶의 법에 대한 항복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좀 더 검토해봅시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일까요? 멍에라는 말의 의미는 어디에서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항복"과 "지배"를 의미합니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약한 나라가 싸움에 져서 굴복할 경우, 우리는 그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의 멍에를 멘다고 말합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붙잡은 전쟁 포로들에게 멍에를 메게 함으로써 그들의 승리를 과시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히브리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강요한 고통스러운 멍에를 상처 난 어깨로 짊어진 채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강조점이 "나의"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지..

S.D. 고든/섬김 2021.01.19

주님의 초대

주님의 초대 예수님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35개의 전도단을 파송하신 것은 그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자신들의 사역으로 인한 놀라운 결과들에 대해 기뻐하면서 보고했습니다. 마귀들조차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예수님 이름의 능력에 굴복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신 후 예수님은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마태복음 11:25). 이어서 주님은 마치 당시의 그 무리들을 보고 계시는 듯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

S.D. 고든/섬김 2021.01.18

오래 전에 오신 주님②

오래 전에 오신 주님②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읽거나 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게는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다가오는 한 가지 환상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언덕 꼭대기에 서 계시는 환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가시에 찔리고 채찍에 의해 갈라진 상처로 얼룩져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분의 커다란 눈은 마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과 가장 멀리 있는 이들 모두를 바라보듯이 열정적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가리키며 뻗어 있는 그분의 팔 끝에서 그분의 손바닥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손바닥에 나 있는 거친 구멍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라" 그분..

S.D. 고든/섬김 2021.01.16

오래 전에 오신 주님

오래 전에 오신 주님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요즘처럼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시절, 남부의 어느 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 도시가 통제 불능의 상태의 전염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빠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수레들이 자갈길 위를 오가면서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이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그 전염병이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집을 덮쳤습니다. 아버지와 아이들이 죽어 수레에 실려 나갔고, 이제 어머니와 다섯 살쯤 된 아들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방바닥을 기어 자기 어머니의 무릎 사이로 파고들더니, 어머니의 팔을 자기 목에 둘렀습니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죽었고, 형과 누나들도 죽었..

S.D. 고든/섬김 2021.01.16

참된 섬김

참된 섬김 사실 제자 삼는 사역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것 외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역에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는 면에서 볼 때, 다른 것들은 세부사항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삶이 있다는 점에 다시 한번 주목해봅니다. 그것은 하나인 동시에 셋인 삶으로써, 은밀한 기도의 삶, 공개적인 순결의 삶, 그리고 적극적인 섬김의 삶입니다. 어느 하나님 있어도 안 되고 세 가지 삶 모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완성된 삶이며, 섬김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삶입니다. 섬김의 삶의 뿌리는 기도와 순결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이유로 많은 섬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삶의 균형을 제대로 유지하지 ..

S.D. 고든/섬김 2021.01.15

적극적인 섬김의 삶②

적극적인 섬김의 삶② ​ 그동안 나는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이 주신 이 마지막 말씀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견해를 인쇄물로 내놓은 적은 없지만 그것은 그들의 삶 속에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인쇄물은 큰 대문자로 되어 있기에 읽기가 쉽습니다. 즉 이런 내용입니다.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가서 동을 벌어 교회에 바쳐라. 그리고 그 돈을 선교지로 보내라." 이처럼 국내와 해외에 있는 선교본부에 값없이 돈을 보내는 일에는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일은 영혼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로 간주됩니다. 사실상 당신이 연말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신의 수중에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느냐입니다. 물론 중요한 게 여기는 다른 것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저 부수적인..

S.D. 고든/섬김 2021.01.15

적극적인 섬김의 삶

적극적인 섬김의 삶 ​ 삼중의 삶에서 세 번째 삶은 적극적인 섬김의 삶, 즉 사람들을 얻기 위해 "공격적이고 진지함"을 보여주는 삶입니다. 여기서 나는 "공격적"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소음과 먼지, 발을 질질 끌고 돌아가는 것, 그리고 부산한 혼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런 소음도 없고, 먼지도 없이 계속해서 매시간, 매일, 폭풍이 오든 소동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태양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매일 밤마다 일어나 자신의 행동의 궤도를 따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나 저항할 수 없고, 방해받지 않는 달의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지함"은 내면의 정신의 타오름을 의미합니다. 그 불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S.D. 고든/섬김 2021.01.15

공개적인 순결의 삶③

공개적인 순결의 삶③ 그분의 삶의 기본적인 원리는 성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면서, 사람들을 이끌어 성부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특성은 순결, 이타성, 연민, 그리고 단순함 등이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에게 성부 하나님을 대표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입술이 아니라 삶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입술에 대한 보증입니다. 삶은 입술의 말을 단지 들리는 소리 이상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입술의 말을 분주히 일하는 할인매장 점원의 말보다도 못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말은 삶의 위아래를 맴돕니다. 물은 계속해서 수평을 유지하려 합니다. 우리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은 물보다도 빨리 그 수평을 발견합니다. 왜..

S.D. 고든/섬김 2021.01.14

공개적인 순결의 삶②

공개적인 순결의 삶②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섰을 때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라디아 2:20)라고 말합니다. 옛날의 나는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습니다. 새로운 내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그는 새로운 나입니다. 바울 안에는 새로운 인격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지금 여기에 누가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기에는 마틴 루터가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죽었고, 지금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

S.D. 고든/섬김 202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