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 고든/요한복음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

예림의집 2021. 7. 1. 21:03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

 

이어서 요한은 다음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두 분은 함께 계시면서 함께 일하셨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역자이며 친구였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지고 만물이 시작되었으며, 그분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성경을 꼼꼼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요한복음과 창세기의 시작 부분이 유사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두 책은 처음에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에"는 창세기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요한복음의 "태초에"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며, 세상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창세기에서의 "태초에"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시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2절에 두 번째로 사용한 "태초에"는 창세기에서 창조가 시작되는 때를 지칭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한복음 1:4)라는 말은 창조주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생명과 만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모든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내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인내하시는 주님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의 거리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시지만 사실 우리는 인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내라는 겉표지만을 알뿐 그 내용을 모릅니다. 알아도 그것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잠시 접할 뿐입니다. 사랑은 인내의 결정체입니다. 인내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최고의 수고와 온유와 선하심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진지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진정으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과 손길에서부터 우리의 생명과 소유가 시작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려고 애씁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은 늘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모든 피조물을 돌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우리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4). 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며,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합니다.

내가 고국을 떠났다가 4년 만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엄청난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육, 종교, 정치, 인권,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더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인간성을 상실하고 기계에 의존하거나, 기계처럼 살아갑니다. 참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점점 더 비인격적인 존재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우리 마음속에는 인격적인 따뜻함이 그 무엇보다 더 요구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인격적 만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며 생명입니다. 사람들은 식물에 대해 연구하지만, 하나님은 꽃들이 향기를 내뿜고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천체물리학을 연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별들로 만드시고 우리의 눈으로 그 경이로운 우주의 신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신학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나는 식물학이나 천체물리학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동방교회나 서방교회에 대한 역사, 초기의 교회 공의회들의 모임, 또는 신학에 대한 약간의 책들을 읽었을 뿐입니다. 나에게 신학은 신비와 경외감이 가득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심오한 신학이 아니라, 꽂들과 별들 그리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아름다운 신비를 더 깊게 체험합니다. 피조물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은 창조주를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절대로 능가하지 못합니다. 대개 우리는 피조물을 향해 달려가며, 피조물에 집착하지만, 창조주는 자기 자신을 주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심방하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를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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