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701번째 이야기
음악만큼 아름다웠던 삶 영화 <마지막 황제>의 OST로 아시아인으로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던 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 그가 암 투병 중 지난 3월 28일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 팬들이 그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 환경 보호 운동에 앞장섰는데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원전을 폐지해야 한다는 "탈원전 음악 페스티벌"을 열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가 일본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다"라는 평화 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제9조를 폐기하고자 하는 일본의 극우세력에 맞서 평화를 외쳐왔습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데 지난 2017년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그는 늘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양심적인 일본인이자 음악인으로 우리에겐 친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나라는 인간은 혁명가도 아니고, 세계를 바꾼 것도 아니고 음악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닌, 한마디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겠다." 그는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서 이토록 박하게 자신을 평가했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가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다는 문장입니다.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늘 "지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인생은 피아노와 같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연주하는 것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집니다! |
첫사랑으로 인한 남모를 슬픔 A는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친구였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고 어떤 순간에도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녀 특유의 유머는 술자리에서 더욱 각광을 받았습니다. A가 입을 열 때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어댔습니다. 모든 사람이 A를 좋아했고, 그녀가 참석한 모임은 너도나도 함께하고 싶어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첫사랑으로 인한 남모를 슬픔이 있었습니다. 저와 단둘이 있을 때면, A는 이미 끝난 지 몇 년이 된 이별의 슬픔과 상처를 떠올리며 술을 지나칠 정도로 들이부었습니다. 그녀가 과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는 "이미 딱지가 앉은 상처를 굳이 긁어서 도로 피를 내는 것과 뭐가 다르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도 매일 옛 기억을 꺼내고 원망하면서 술을 마시는 주제이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몸짓과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울고 술을 마시고, 또 울고 다시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저는 그냥 그녀의 속도에 맞춰서 잔을 부딪쳤습니다. A는 "저한테서 늘 많은 위안을 얻는다."라고 하면서 고마워했습니다. 지나간 기억을 부여잡은 채 상처를 헤집고, 과거를 핑계 삼아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그녀를 보면서, 저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술에 잔뜩 취해서 망가진 얼굴로 100번도 더 했던 말을 다시 쏟아내는 그녀를 보면서,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휴! 오늘도 택시에 인사불성으로 누워서 가시겠군! 이번에도 돈 한 푼 안 내고 가겠지. 내일이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면서 몸이 아프다고 투덜댈 거고.." 저는 그녀를 불쌍하고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그래도 내가 이 친구보다는 낫다"라는 작은 위안을 찾았습니다. "나는 적어도 A처럼 행동하지는 않으니,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때면 안도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일부러 나보다 문제가 많은 사람과 매일 만나고, 그들을 한심해하거나 불쌍하다고 여기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가졌던 것입니다.(윤은희) 윤은희 님은 이 글에서 친구보다 자신이 더 낫다거나, 아니면 친구의 모순된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를 털어놓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결코 그 친구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를 보면서 스스로 그 친구보다 내가 낫다는 식으로 상대적 우월감을 가졌다는 겁니다. 사실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합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제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있는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하니다. 사랑은 한계가 있을까요? 사랑하지 못할 사람도 있는 것이 나닐까요? 한 번 노트에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부류를 적어보십시오. 사랑하기 너무 힘든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인정하시지 않을까요? 상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렇다!"라는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보면 우리의 다은 "아니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계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니 특히,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 이상의 것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장 절박할 때 만나 주심으로 사랑을 가시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사려 깊게 긍휼을 표현하셨습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만지신 사건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병 환자였습니다. 1세기에 나병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나병은 사지의 감각을 잃게 만드는 불치병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병 환자를 알아보기 쉬웠습니다. 얼굴이 변색되고 온통 종기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의 냄새를 맡기도 쉬웠습니다. 참기 힘들 만큼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하나님의 저주라 여겼고, 매우 전염성이 강한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병 환자를 만지는 즉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나병 환자는 평생 누구와도 신체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존재로 선포되어 상회로부터 강제로 격리당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면 "불결하다! 불결하다!" 하고 외치며 경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병 환자들은 절대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나병 환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보다시피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 이야기는 결국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좁혀집니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집중하셨고 사랑하고, 그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 철학이요, 일상의 리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병 환자가 랍비에게 다가온 전례가 없었습니다. 감히 그런 짓을 했다간 무자비한 폭력과 굴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셨습니다. 하지만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누구도 멀리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심지어 나병환자도 다가갈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누가복음 5장 12절,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그 냄새는 마치 그를 둘러싼 방책과도 같아서 누구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자신이 다가가도 될 만큼 예수님이 좋은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 주려 하실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여 하실 수 있다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능력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걸 "원하실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사랑받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그동안 매일같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
언약궤를 메어 오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사무엘하 6장 1-15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알레유다에서 다윗성으로 옮겨 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절, "바알레유다"는 "유다의 바알레"라는 뜻으로 "기럇바알", "기얏여아림"으로도 불리웁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다윗성으로 옮깁니다. 이는 왕조의 교체시기 혼란했던 왕권을 온전히 세우기 위함입니다. 나곤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자 웃사가 손으로 언약궤를 붙들었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웃사가 죽습니다. 언약궤를 두었던 오벧에돔과 그의 집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다윗이 다시 기쁜 마음으로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깁니다. 언약궤 운반에 실패함(1-8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지키지 않을 때 공의의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자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새로운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겨 오고자 하니다. 언약궤가 있던 "바알레유다"는 "바알라"의 다름 이름으로 여호수아 15장 9절에서는 "기럇여아림"으로도 부릅니다. 다윗은 3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모아 화려하고 성대하게 언약궤를 운반합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지 않고 새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출애굽기 37장 5절, 민수기 7장 9절, 언약궤는 반드시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을 잊고 사무엘상 6장 8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던 방식으로 언약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므로 법궤를 붙잡던 웃사가 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언약궤를 다루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자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임의로 행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경고하고 계신지 묵상합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9-15절).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기 이해 연 행사에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는 두려움으로 인해 행사를 중단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를 둡니다.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석 달 동안 하나님이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는 것을 보고, 다윗은 언약궤 문제가 아니라 운반 방법의 문제였음을 인식합니다. 이번에는 규례에 따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기쁨으로 다시 운반합니다. 다윗은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제사를 지내며 하나님께 은혜와 평안을 기원합니다. 드디어 언약궤가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전합니다. 블레셋을 물리친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을 흔드는 외부의 적을 무너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는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의 많은 것이 자신을 봐 달라고 유혹합니다. 그럴수록 성도의 눈은 주님게 고정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우리가 다시 시도할 일은 무엇인지 묵상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경고가 주어질 때, 자신을 돌아보며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고 겸손한 마음으로 문제를 바로잡게 하시옵소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늘 주의 깊이 세우게 하시옵고, 세상의 많은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만을 붙잡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이 기준입니다 이따금 "내가 정말 잘 가고 있나?"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24시간 주님과 동행하려고 하지만 결국 안 되는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명확한 기준으로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라!"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지 여부는 자신의 느낌이나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곳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으면 멈추어야 합니다. 저는 다만 "성경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을 믿을 뿐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휴대폰 등 옛날에는 상상도 못 한 물건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을 위한 음식 재료는 곡물과 채소와 고기 등 과거 그대로입니다. 우리 영혼을 위해 필요한 것도 새로운 뉴스와 새로운 기기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생명의 양식인 성경입니다. 성경에 쓰인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쓴맛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명의 쓴맛을 능히 감당할 은혜의 단맛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말씀을 배불리 먹고 그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분별이 어려운 이때, 매 순간 성경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예수 소망/유기성 목사) |
성만찬-참여① 예수님은 떡을 취하여 떼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취하여 부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요 내 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취하여 먹고 마시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들을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드라마의 보고 듣는 관객이었을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거기에 참여한 참여자였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성만찬은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기념식의 의미를 넘어서,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재의 은택들을 나누는 교제이니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이 강조했던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이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지는 논란의 여지없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질문이 우리의 대답을 요구합니다. 첫째, 실제로 우리는 무엇에 참여하는가, 둘째,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참여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면 우리는 주의 만찬 시 무엇에 참여할까요 대답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와 함께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택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관해서 명확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일각에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분의 죽음이 아닌, 그분의 생명을 의미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인성을 담아 두는 도구에 불과하며, 또 우리의 피는 생명을 제공하는 산소를 운반하는 수송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모두 그분의 살아 있는 인성을 상징하며, 우리가 성만찬 때 받는 것이 이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내용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팔레스틴에 살았던 몸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드려진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피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혈관 속에 흘러 다니던 피가 아닌, 자신의 대속의 죽음에서 뿌려진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분의 생명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죽으심을 통한 은택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계속..!) |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게 하소서!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삼상 16:13) 오늘도 우리에게 새 영을 부어 주시는 주 하나님!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평가와 다른 평가로 우리 영혼을 보시고, 이끄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오늘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와 다스림을 향한 갈망을 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소망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 위에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솟아나시고, 충만하시고, 흘러넘치시옵소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아닌 주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연합을 이루기 원합니다. 주님만 드러내며 나타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멈추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그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그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작은 일을 소중히 하라!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말입니다. "작은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은 작은 일이 쌓이고 쌓여서 큰일이 되는 체험을 해온 사람들이다. 또한 인생에서 작은 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온 사람이기도 하다. 큰일을 끊임없이 해낼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작은 일을 성실하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끝없이 감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작은 일을 감사하는 사람이 큰일을 이룬다."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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