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695번째 이야기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 미국 프로야구에서 "42"는 특별한 숫자입니다. 어떤 선수들도 달 수 없는 전구단 영구결번이지만 1년에 딱 하루, 4월 15일엔 특별한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서 모든 선수가 42번을 달고 경기를 뜁니다. 그 선수는 바로 재키 로빈슨, 1947년 4월 15일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메이저리그에 등장한 최초의 흑인 선수입니다. 흑백 차별이 엄존했던 그 무렵엔 혁명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미식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육상 4개 종목에서 활약하며 모든 종류의 운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역대 NCAA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을 만한 대학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전차부대에 장교로 임관했지만, 부당한 인종차별에 맞서다가 면직당했습니다. 그 뒤에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팀과 계약하며 본격적으로 야구계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7년에는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흑인이 "백인의 전당"을 처음 밟은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상대 팀뿐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도 그를 무시했고 군중의 야유와 협박 편지가 쇄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무시무시한 경기력으로 데뷔 첫해 신인상을 받았고 10년간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재키 로빈슨 덕분에 메이저리그를 짓누르고 있던 인종차별이란 큰 벽은 허물어졌고 유색인종의 운동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편견이라는 단어의 뜻은 "특정 집단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가지며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결국 편견은 사실도 진실도 아닌 한 사람 또는 특정 집단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편견의 안경을 쓰고 삽니다. 투명하고 깨끗한 안경, 얼룩진 안경, 깨진 안경, 색안경.. 다른 사람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에 어떤 안경이 씌어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
정말 미안해! 강한 이기심을 갖고 살았던 과거 저의 인생에는, 사랑 기쁨 감사 연민 등과 같은, 누군가에게 공감하거나 타인을 배려하는 감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오만했던 저는 감사하거나 미안해할 줄도 몰랐습니다. 공감능력을, 타인은 물론, 저 자신에게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몸을 혹사시키면서도, 제 몸과 마음에 대하여 미안해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과 마음을 몰아세우면서 화내곤 했습니다. 더 높고 더 두꺼워진, 저의 이기심이라는 성채(城寨)는, 나를 나 자신만의 성안에 갇힌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배우고 깨닫는 과정에서, 저는 마치 저 자신이 조각조각 해체되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빚어온 가면이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제가 원했던 저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열심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저의 모든 단점을 사랑으로 끌어안지 못했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열심히 꾸며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의 해체과정을 통해서 저의 본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냥 그게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누군가가 저보다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불안해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자만심을 느꼈습니다. 내면보다는 외면을 가꾸는데 치중하는, 좁은 식견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라는 진실을 받아들이자, 더 이상 저 자신을 꾸미며 살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받아들임,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랑으로 저의 단점을 끌어안기로 했습니다. 저의 목표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에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과 끊임없는 자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지금까지 엉망으로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목숨을 지켜준 저의 몸에 대하여 사과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또한, 그동안 몰아세우기만 했던 저의 마음을 향하여 진심 어린 사과를 했습니다. “정말 미안해!”(김선아) 그렇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올바르게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을 때,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입니다. 고로,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입니다. 성령을 우리 마음에 늘 모시고 살려면 우리 몸을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
일단 한번 시도해 보라 이렇게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여러분이 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말에는 그런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말을 신중히 선택할 생각이 없습니까? 제가 앞서 제멜바이스가 의사들이 손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1840년대 당시, 의사들 대부분은 제멜바이스의 메시지를 완전히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멜바이스는 깨끗한 손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단순한 손 씻기가 그토록 중요할 리가 있겠냐며 그를 조롱했습니다. 저 역시 말이 살리고 죽일 힘이 있는 이유를 완벽히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말에 살리고 죽일 힘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의사들이 제멜바이스의 조언을 거부한 두 번째 이유는 자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멜바이스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며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산모들의 죽음이 자신들의 탓이라고 인정하는 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록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그런 엄청난 비극을 야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자책감을 느낄까 봐 자기 말의 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로 상처와 고통을 준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일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사들이 수술 전에 손을 씻으라는 종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그 해법이 너무 단순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의사들로서는 손 씻기와 같은 단순한 생동이 산모 사망률을 낮추는 해법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신중히 선택하는 것"처럼 단순한 게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는 열쇠라는 점을 믿기 어려운가요? 1840년대 의사들은 좀처럼 제멜바이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계속해서 강권했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해 보십시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떻게 되는지 일단 한번 해 보세요!" 저도 여러분에게 강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에 힘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시도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십시오! |
전사자들을 애도하는 긍휼의 리더십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사무엘하 1장 1-16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사울의 죽음을 전해 들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의 죽음을 애도하고 통곡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이 아말렉을 치고 돌아와 시글락에 있을 때, 사울 진영에서 도망 온 아말렉 청년이 이스라엘의 패배를 알립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에 다윗은 저녁때까지 울며 금식합니다. 청년은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인 죄로 그를 죽입니다. 사울은 비록 다윗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괴롭혔던 정적이었지만 그의 비참한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큰 슬픔이 된 것입니다. 사울의 죽음을 알린 청년(1-10절). 어떤 사람의 진정한 신앙과 성품을 파악하려면 그에게 권한과 권력을 쥐여 줘 보면 됩니다. 사울은 이에 실패하여 비극을 맞이하였고, 아제 다윗에게 그 역할이 넘겨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극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 하는 태도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었을 때,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아말렉 청년이 다윗에게 찾아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고 전합니다. 사울의 죽음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청년은 부상으로 창에 기대고 있는 사울을 보았고, 죽여달라는 그의 부탁을 받았으며, 그가 살기 힘든 상태임을 확인하고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합니다. 그는 그 증거로 왕관과 왕의 팔찌를 보여줍니다. 사울과 다윗의 적대 관계를 알고 있는 청년은 그렇게 보고하면 자신에게 큰 상을 주리라 기대한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얄팍한 지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거짓 증거까지 대며 다윗을 속인 값을 톡톡히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기대와는 먼 대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해관계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고 한 적은 없는지 마음 깊이 묵상합시다. 사울이 죽음을 슬퍼한 다윗(11-16절). 다윗의 생각은 아말렉 청년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금식합니다. 그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뿐 아니라 전사한 군사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서도 애도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다운 성숙한 면모입니다. 이름 없이 전쟁에서 희생당한 백성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중요한 덕목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는 아말렉 소년의 말과 증거를 근거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인 죄를 엄중히 물어 그를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13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요 생명입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막 출애굽했을 때 뒤처진 노약자들과 어린아이들을 공격항 비열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그 후 그의 비참한 죽음은 진멸하지 못한 아말렉 사람에 의해 알려집니다. 이는 아이러니입니다. 16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라는 말은 살인죄를 적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다른 사람의 비극을 접할 때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어떠해야 할지 마음 깊이 묵상합시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집요하게 목숨을 위협하던 사울의 죽음 앞에서 다윗이 취한 태도를 보며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우리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도 긍휼과 사랑을 잃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하며 기도하는 참 신앙인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넓게 하셔서 너그러운 마음이 되게 하시고, 사울의 죽음을 슬퍼할 뿐 아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의 죽음까지 애도한 다윗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선한 목자 예수님처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자신에게 득이 되느냐 안 되느냐,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느냐 아니냐를 기준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를 기준 삼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과 등산 가는 사람을 천지 차이처럼 다르게 보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주일에 등산 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예배의 자리로 인도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이 교회를 다니건 안 다니건, 어떤 모습과 행동을 하건 그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주장을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부인을 "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옳음과 합당함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모두를 끌어안기로 결정하는 것이 권리, 권세, 권위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출발점은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그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길 간구하며, 그분을 끝가지 따라가야 합니다.(왜 예수인가? WHY JESUS/조정민 목사) |
미래를 내다보는 것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기원(petition)" 혹은 "간구(supplication)"입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이 드리는 기도 중에서 이것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을 제일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간구를 아뢰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하늘 아버지께 나아와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 죄에 대한 용서 그리고 악에서부터 구원 등을 위하여 그분을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분께 그것을 굳이 아뢸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그것들을 공급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어르거나 조를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애 간구해야 할까요? 이 기도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존 칼빈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것들에 대하여 그분께 알려 드린다거나, 그분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재촉하거나, 그분이 마음 내켜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을 억지로 설득하려는 목적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신자는 그분께 간구하도록 스스로를 일깨우고, 그분의 약속들을 묵상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심을 발휘하며, 자신의 염려를 그분의 품에 내려놓음으로써 안도감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기도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모든 좋은 것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분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따러서 간구의 목적은, 하나님이 무지하기 때문에 정보를 알려 주려는 것도, 그분이 마음 내켜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을 설득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맞게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맞추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부 하나님은 자식들의 응석을 다 받아 줌으로 버릇없는 자식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뜻을 갈망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내다봅니다. 우리는 내일, 다음 주 그리고 내년에 해야 할 일들과 과제들, 희망과 두려움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어날 수 있는 질병과 부모님과의 사별, 우리의 죽음, 재림과 부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더 멀리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또 일어난다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그야말로 불확실성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원, 우리의 기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가지 기도만을 할 뿐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며, 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도 생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한, 성자를 통한, 성부와의 교제 체험, 즉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체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정해 놓은 기도 시간에 익숙해지면 그럴수록,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데살로니가전서 5:17)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요한복음 15:1-8)이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까지 그분의 임재가 그 시간들을 가득 채워 줄 것입니다! |
용서의 마음을 주소서!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14,15). 주님, 용서하기 힘들 때 용서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저도 주님 앞에 너무나 무가치하고 무자격한 존재라서 용서를 들먹일 존재는 못되지만, 받은 상처로 인한 충격이 너무나 커서 도무지 삭혀지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이상한 독기로 요동치고 있고, 절제할 수 없는 저주의 말이 여과되지 않은 채, 제 입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 모습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과 너무도 먼 모습을 하고 있고,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했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힘에 조종당하고 있는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요서가 안 되지만, 십자가로 용서의 극치를 보여주신 주님의 온유와 겸손하심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 죄인의 심령에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정작 주님께 용서받아야 할 자는 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제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을 넓은 아량으로 품을 있게 하시옵소서. 더 나아가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게 하시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철든 종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내 인생의 출발은?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겨울은 눈이 있어 좋고,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것 같아서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져서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서 좋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은 추워서 싫고, 봄은 황사 때문에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다..!" 이런 사람은 겨울이 되면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하니까 행복할 틈이 없습니다. 작은 집에도 살아도 잠잘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멋지게 사는데 "나는 왜 이래!" 하고 비교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침에 "잘 잤다~🎶" 하고 눈을 뜨는 사람은 행복의 출발선에서 시작하고, "죽겠네!" 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불행의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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