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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예수 그리스도

예림의집 2023. 3. 4. 21:56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요한계시록 1장 12-20절).

 

오늘날 우리에게는 과거의 예수님이 아닌 현재의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어떤 교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절대 풀어주지 않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예수님을 유리 액자 속에 감금해 놓고 액자 앞에 엎드려 차가운 유리에 입을 맞춥니다. 또 다른 교회는 전통적인 의식과 아름다운 음악과 장중한 예배로 예수님의 모습을 치장합니다. 사람들은 한 장소에 조용히 모여 앉아 예수님에 관한 설교를 듣고 예수님께 기도하지만 예배 시간에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건 환경이나 배경과는 상관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갈급함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예수님에 관해 학구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런 주님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어떨 때에는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르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예수님을 "자유주의"라는 틀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꽤 매력적인 해석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으로도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서구의 많은 교회들과 그들을 답습하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예배에 새로운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도가 너무 심해 가끔 어리둥절할 때가 있습니다. 예배가 휘황찬란하고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잠잠히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려면 요란한 소음을 피해 조용한 골방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과의 개별적인 교제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개별적으로만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오른편에서 중보 기도하는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다른 예수님, 즉 예수님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을 옆에서 돕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물론 구원은 절대적인 은혜이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 말고는 "그 이상의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새로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신선하게 다가오길 기대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목공소에서, 회반죽을 바른 작은 집에서 지내는 평범한 유대인 남자였습니다. 요단강에서 겟세마네 동산까지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도 고쳐주었습니다. 십자가에 아홉 시간 동안 매달려 고통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처럼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을 때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 안에서 빛나는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두운 눈이 밝아지면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수많은 무리들을 떠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에게 돌로 맞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하늘에서 비치는 영광의 빛과 주님의 음성에 압도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 바울은 그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분,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또 만물이 그의 발 앞에 복종하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과 누구보다 친밀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을 고대하십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뛰어넘게 만드는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핵심입니다. 요한은 직접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한 뒤 계시록에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책이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기록된 책입니다. 이 책은 1장 1-3절에서 요한이 계시를 알게 된 과정가 이 예언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다음 이 4-8절, 말씀을 읽을 일곱 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요한계시록은 특히 교회 공동체를 위한 책입니다. 사실상 이 책의 독자는 신자 개개인보다는 교회로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요한은 환상 속에서 본 그분께 집중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고 다시 우리에게 오실 분입니다.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재림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보면서 후회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8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또 9-20절에 걸쳐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모습을 묘사합니다. 요한은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밧모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주의 날, 섬 안에 홀로 있는 요한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외딴섬 유배지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요한의 마음이 전율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었고, 그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셨고,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되새길 때 하나님의 영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산들바람처럼, 싱그러운 이슬처럼 다가와 요한의 영혼을 강렬하게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하게 들려왔습니다. 11절,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라". 주님은 요한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음성이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일곱 개의 금 촛대가 있었습니다. 그 촛대 한가운데에 "인자와 같은 분"이 서 계셨습니다. 해처럼 뿜어내는 급분의 영광에 압도되어 요한은 죽은 사람처럼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이 강렬한 순간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분의 머리와 머리칼, 눈과 발, 음성과 손, 입과 얼굴을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분은 보통 사람들처럼 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본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첫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인간의 모습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였습니다. 그분 안에는 하늘의 영광이 가득했는데, 그것이 요한이 압도당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분에게서 영광의 빛이 퍼져 나왔지만 그렇다고 신적인 영광이 그의 인간적인 요소를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이 오히려 인간의 가장 완벽한 모습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창백하거나 분칠을 해서 하얀 것이 아니라, 몸 자체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눈빛은 불꽃같았고 발은 풀무 불에 달군 놋쇠처럼 강인해 보였습니다. 얼굴 전체는 맑은 하늘에서 강렬하게 내리비치는 태양을 닮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의 신성이 가득했으나 그것이 인간성을 압도하거나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불의 형상을 띠거나 불처럼 빛나는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목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은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불보다 더 정결한 것은 없습니다. 불은 모든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 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거나 불의한 것을 없애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항상 불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입니다. 그 불길을 견디지 못하면 타버립니다. 그 불은 정결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정결하게 만드는 일을 담당합니다. 하나님은 정결하십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하나님은 눈이 불꽃과도 같고, 얼굴은 해처럼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발은 풀무 불에 달군 놋쇠와도 같았습니다. 어떤 존재도 이보다 더 정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 자체에서 막강한 권위가 느껴집니다. 요한은 그 느낌을 세상의 언어로 옮기려 했지만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였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예전에 변화산에서도 영광을 빛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요한에게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그분은 요한에게 이렇게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8절,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그분의 권위 앞에서 모든 생명이 두 손을 들었고 죽음마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자가 없습니다. 그분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모든 표현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그분의 위엄 앞에 압도되었습니다. 언어를 가지고 표현한다면 그 대상을 한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휩싸고 있던 그 강렬한 느낌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누구입니까? 에스겔서 1장 26-28절,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보좌 위에 있는 사람 형상을 보았는데, 불처럼 광채가 낫습니다. 에스겔도 그 형상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다니엘서 10장 5-9절,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몸에서 광체가 났습니다. 말하는 소리는 큰 무리가 내지르는 소리처럼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권위 있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다니엘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정신을 부여잡고 권위 있는 자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분명히 압도적이고 어마어마한 목소리였지만,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이기도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다음 이어지는 음성도 새로운 느낌의 평안함을 주었습니다. 17-18절,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여기까지는 에스겔이 만난 사람이나 다니엘이 만난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한 마디가 있습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이 한 마디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요한이 본 사람은 에스겔과 다니엘이 본 사람과 다르지 않지만, 거기에는 무언가가 더 있었습니다. 이들이 본 사람은 후에 이 땅에서 우리와 섞여 살았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던지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것을 똑같이 경험하고 고통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창조자이고 구원자였습니다.
에스겔과 다니엘이 본 사람이나 요한이 본 사람 모두 정결하고 권위 있는 존재였지만 요한이 본 사람에게는 또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죽게 되었지만 다시 부활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음도 그를 좌지우지할 수 없었습니다. 정결하고 권위 있는 분께서 우리를 위해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조차 전에는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본 사람은 에스겔과 다니엘이 본 사람과 같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은 정결과 권위를 통해 사랑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그분 자체가 사랑입니다. 자신의 모든 권위를 행사해 죄의 가시와 함께 자신의 정결함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사망을 죽이고 새로운 생명을 불러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에 요한의 눈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습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주님을 넘어, 시내산의 주님을 넘어, 십자가의 주님을 넘어, 이제 천국에서 재림을 기다리시는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마음에 세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 불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