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675번째 이야기
악마의 3대 도끼 독일 민화 중 "악마의 3대 도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악마들이 모두 모여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 회의를 가졌습니다. 그 회의에서 악마들은 인간을 붕괴시키는 특수 무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세 개의 도끼였고 우두머리 악마는 도끼를 들어 보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세 가지 도끼 중에서 하나만 사용해도 대부분의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다. 그리고 세 가지 도끼를 모두 사용하면 넘어지지 않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 첫 번째 도끼는 "붉은 도끼"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슴속에 움트는 믿음을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도끼는 "파란 도끼"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의 희망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까만 도끼"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라는 사랑의 줄기를 베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순수함을 잃어가고 성인이 되면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기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유혹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달아나기입니다. 잘 달아나는 것이 때로는 넘어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
무슨 일이 가장 괴로울까요? 인생에 있어서 무슨 일이 가장 괴로울까요? 가난? 아닙니다. 실의? 아닙니다. 늙는 것? 죽는 것? 모두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괴로운 일은 "완수하지 못한 책임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만일 지족(知足)할 줄 안다면, 비록 가난해도 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분수기(安分守己)할 수 있다면, 비록 실의 했다 하더라도 괴롭지는 않을 겁니다. 늙거나 죽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달관한 사람들은 그냥 평범하게 보아 넘길 수도 있는 것이지, 무슨 괴로움이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분수기란 "분수에 만족하여 본분을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루라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하면, 마치 몇 천 근의 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과 같아서, 더할 나위 없이 괴로운 겁니다. 왜냐고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달아나 숨으려 해도 숨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주겠노라 약속한 한 가지 일을 처리하지 않았거나,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렸는데 돌려주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입고도 보답하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는데도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의 얼굴을 감히 바라볼 수가 없게 될 겁니다. 설사 그 사람의 얼굴은 안 본다고 해도, 꿈속에서라도 그 그림자가 나타나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고요?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비단 한 사람에게 대해서도 이럴 뿐만 아니라, 가정에 대해서도, 사회나 국가에 대해서도,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성의제 단국대교수)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십계명은, 우리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과, 우리가 반드시 해야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우리는 사명이라 하기도 하고 당위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뜻하는 명(命)은, 생명(生命) 곧 목숨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계명을 잘 지켜야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는 겁니다. 고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양심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아주 강력히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족,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이 있습니다! |
긍휼과 은혜는 다 어디에?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번에 한 사람씩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주된 방법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성경 한 부분을 더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 4-6절과 9-10절입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예수님을 알고 그분 안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분처럼 살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만큼 잘 담아낸 구절도 없는 듯합니다. 그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랑입니다(5절). 즉 남들이 자신에게 악하게 행하는 것들을 마음에 담아 주지 않고 깨끗이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인, 불경한 자, 배신자, 비난하는 자, 부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내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은혜와 긍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불일치가 일어나는 건 우리가 막연하게 남들을 이렇게 사랑한다고 생각할 뿐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은혜와 긍휼에 동의하지만 실제로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은혜와 긍휼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 방송부터 그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악한 영을 물리치는 성령의 사람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 원하건대 우리 주께서는 당신 앞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는지라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사울이 이에 전령들을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사울에게 보내니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사무엘상 16장 14-2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악령에 시달리는 사울을 위해 다윗을 데려와 수금을 타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더나니 하나님이 부르시는 악령이 그를 괴롭힙니다. 신하들은 사울에게 수금을 타면 나이질 거라고 하면서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다윗을 추천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해 자기의 무기 드는 자로 삼습니다. 사울이 악령에게 사로잡힐 때에 다윗이 수금을 타면 악령이 떠나고 회복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첫 번째 왕 사울과 사울을 대신해 새로운 왕이 될 다윗의 만남이 하마님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악령에 시달리는 사울(14-17절). 성도의 인생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남과 동시에 악령이 사울을 사로잡습니다. 14절, "하나님이 부르시는"이라는 말은 악령마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악령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려줍니다. 불신과 불순종은 악한 영이 틈타는 기회가 됩니다. 반면에 이해되지 않은 일에도 신뢰와 순종을 선택하면 하나님의 영이 늘 함께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다윗과 악령에게 사로잡힌 바울이 대조되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세상도 다스리기에 악령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심판하실 때, 사사기 9장 23절과 열왕기상 22장 19-22절처럼, 악령을 보내 재앙과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에게 사울이 사로잡힌 것은 그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악령으로 인해 발작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처음에 왕으로 선택받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하던 모습과 상반됩니다. 신하들은 사울을 위해 수금 잘 타는 자를 소개하는데, 그가 바로 버림받은 사울 대신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입니다. 사울을 섬기는 다윗(18-23절).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죄를 직면해 진심으로 회개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입니다. 18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는 소개는 사람들 사이에 다윗의 평판이 좋았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양을 치던 다윗을 부릅니다. 사울은 새로 선택된 왕이 다윗임을 알지 못한 채 그를 만납니다. 사울은 다윗을 사랑하고 신뢰해 자신의 무기를 드는 부하로 삼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윗이 자기 라이벌임을 알기 전까지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면 악령이 떠나고 사울은 회복됩니다. 다윗이 수금을 잘 타거나 수금 자체에 영적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다윗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사로잡은 악령을 내쫓은 것입니다. 이름 모르고 평안히 다윗의 수금 타는 소리를 듣는 사울의 모습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비참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다스리는 삶과 악령이 다스리는 삶은 어떻게 다른가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의 삶 영역에서 일어나는 영적 역사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묵상합시다. "거룩한 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흙으로 지으신 육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고 저희를 위해 성령님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며, 찬양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온전하게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치유하시고 살리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악한 영이 강하게 역사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능히 대적할 힘을 부어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진정한 거목의 특징 시드니에 살 때 큰 나무들이 강풍에 넘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그토록 우람한 나무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겉모양만 거목이었던 것입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존심을 잃고 뿌리를 드러내고 맙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짧은 기간에 높이 자랍니다. 그래서 뿌리를 내리는 속도보다 위로 뻗어 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독이 욉니다. 거목이란 키가 큰 나무가 아니라 뿌리 깊은 나무입니다. 나무의 자존심은 키가 아니라 뿌리에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수록 더 단단히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땅 밖으로 그 뿌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허영심을 내뿜는다거나 자기 위상을 뽐내지 않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바닷가의 나무들이 그런 특징을 갖습니다. 모진 바람에 시달리면서도 자리를 지킨 내공이 응축되어 있는 뿌리에 힘이 있습니다. 높이 오르고자 하는 유혹을 거부한 "내려감의 용기"가 험지에서도 생명력을 키운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시련 앞에서야 깊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돈에 마음이 흔들리면 뿌리가 얕은 것입니다. 누가 몇 마디 했다고 길길이 화를 내면 뿌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약한 나무입니다. 작은 칭찬에 들뜨는 마음은 갈대와 같습니다. 유혹에 흔들릴 때 뿌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습니다.(평온의 숲으로/ 이규현 목사) |
이웃을 향한 사랑② 마태복음 5장 21-22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의 생각에 따르면, 부당하게 화를 내는 것과 욕을 하는 것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근본적인 규범입니다. 인간 생명의 신성함이야말로 구약에서 사형이라는 형벌이 제정된 근거였습니다. 창세기 9장 6절,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성경에 따르면, 사형이란 살인자의 죽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자의 죽음에 똑같이 상응하는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독특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 4장 13-15절에서 하나님이 친히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사형으로부터 보호하셨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살인자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생명을 취할 권위, 즉 "칼을 지닐" 권세(로마서 13:4)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어쩌면 거의 모든 경우에 형량을 경감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럴 때는 사형을 종신형으로 감형해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동일한 원칙은 인간의 태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문제로 대두됩니다. 태아는 적어도 생성되고 있는 인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생명은 일반적으로 신성 불가침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임신 중절 합법화를 지지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임신 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들은 낙태에 의한 태아의 파괴를 극히 조심스럽게 제한한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살인으로 간주하며, 태아에 대한 실험을 법으로 금지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전쟁도 인간 생명의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사건입니다.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전쟁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둘로 갈라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은 악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금하고 있다고 믿는 평화주의자들과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큰 악과 그보다 작은 악, 양자 중에서 전쟁은 좀 더 작은 악으로서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 "의로운 전쟁" 이론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전쟁 옹호자들도 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정당화하며, 무차별 파괴를 초래하는 핵무기, 화학무기, 세균성 무기 등의 사용만큼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
친근한 삶을 살게 하소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 사랑의 주님! 이런 모습이 있는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것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며, 불필요한 대화에도 정감 있는 대화로 응할 수 있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 다른 사람의 큰 실수에는 넉넉한 관용을 보여주며, 큰 허물도 감싸주고 덮어줄 수 있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 다른 사람이 안고 있는 아픔에는 따뜻한 위로를 아끼지 않으며, 용기와 자신감으로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진지함으로 귀를 기울이며, 강경한 행동에도 대립하지 않고 존중해 줄 수 있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 다른 사람의 거친 행동에는 온유함으로 설득하며, 무시하는 태도에는 넉넉함과 푸근함으로 받아줄 수 있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이런 모습으로 삶에 희망을 더하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아홉 명의 병자가 감사하지 못한 이유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고침 받은 열 명의 한센병자 중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던 아홉 명의 심리를 알아봅시다. 첫 번째 사람은 병이 진짜 나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느라, 두 번째 사람은 병 낫기는 했지만 다시 재발할지 모르리까 좀 더 두고 보느라, 세 번째 사람은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예물도 준비해서 천천히 찾아뵈려고, 네 번째 사람은 "이제 보니 한센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다섯 번째 사람은 "약간 나은 전도야. 겉에 있는 부스럼은 떨어져도 속에는 아직도 병이 남아있을지 몰라." 여섯 번째 사람은 일단 제사장에게 뛰어가서 자기의 몸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받은 후에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며 돌아다니느라, 일곱 번째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애쓰신 것도 별로 없어. 약을 발라주신 것도 아니니까.." 여덟 번째 사람은 "이런 것은 랍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뭐.." 아홉 번째 사람은 "사실 나는 이미 회복되고 있었다고! 저절로 나았다고 생각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저의 상상력입니다만, 어쨌거나 아홉 사람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예수님께 되돌아가 감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 번째 사람은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병을 낫게 해 주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감사도 이렇게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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