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676번째 이야기
방심한 오리..! 캐나다에 서식하는 야생 오리들은 겨울철이 되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다 오리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 있는데 바로 나이아가라 강입니다. 오리들은 호수처럼 평온한 강에서 먹이를 찾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며 한가롭게 휴식을 즐깁니다. 그러나 오리들의 그 평온함 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세계 3대 폭포로 꼽힐 만큼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강 하류에 있는데 그곳의 급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셉니다. 그리고 평온함 속에 있던 오리들이 폭포를 발견하고 날아오르려 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급류가 오리의 발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많은 오리는 폭포에 휩쓸려 낭떠러지로 추락해 버립니다. 방심했던 오리들이 어김없이 거센 폭포에 희생되는 것입니다. 위기는 평화롭고 한가한 기회를 노리고 서서히 우리를 조여옵니다.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안락함에 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훗날 우리에게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
무슨 일이 가장 즐거울까요? 그렇다면, 무슨 일이 가장 즐거울까요? 책임을 완수했을 때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이, 책임을 벗어난 뒤의 홀가분한 기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럴 때에는, 그 홀가분하고 유쾌한 기분을 말로 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임이 중하면 중할수록, 책임을 져야 하는 세월이 길면 길수록, 책임을 완수했을 때에는 그 즐거움이 몇 배나 더 커질 것입니다. 대저, 천하의 모든 일은 괴로운 가운데서 얻어지는 즐거움만이 진짜 즐거움인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괴로운 곳에서만이 비로소 ‘책임을 다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괴로움과 즐거움의 순환이 있어야, 활력이 있는 인간의 한 가지 재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고통은, 그 자신이 스스로 불러오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책임을 다하면 어느 곳에서나 즐거움이 생기는 법입니다. 시시때때로 책임을 다하면, 시시때때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권리, 즉 기쁨과 만족을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고 하는 것은, 모두 그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기왕에 책임져야 하는 데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라면,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미루거나 벗어버리면,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책임이란, 완수해야만 없어지는 것이지, 미루거나 벗어버린다고 해서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두서너 살 먹은 어린이라면 본래 책임질 일이 없으니 괴로움도 없겠지만, 그러나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책임을 다하면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큰 책임을 다하면 큰 즐거움을, 작은 책임을 다하면 작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성의제 단국대교수) 저에게는 매주 설교문 작성하는 것이 큰 짐이 되곤 했습니다. 미리 설교문을 작성해 둬야 가벼운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설교문 작성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30분 정도의 설교를 하려면 꽤 긴 문장을 작성해야 합니다. 딱 한번 어쩌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3년 전에 사용했던 설교문을 가지고 강단에 건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땐, 저 자신이 은혜가 안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송하고 성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에, 그 심적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설교문 준비가 이제는 은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 우리는 좀처럼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것은 아는데 왠지 남들이 지은 죄가 훨씬 더 크고 심각해 보입니다. 우리는 자시느이 죄를 합리화하거나 아예 인식하지 못하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라는 생각은 긍휼이 아닌 비난과 정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죄가 있는 자는 남의 죄를 정죄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만 정죄할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여인을 돌로 치기 위해 끌고 았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죄가 없다면, 이 여인을 정죄해도 좋다. 그렇다면 이 여인을 너희 마음대로 하라!"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분노한 자들을 살인자와 같은 부류로 취급하신 후 음욕을 품은 자들을 실제로 간음을 저지를 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7-28절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간음을 저지를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간음은 다른 누군가의 죄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음은 당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날 예수님이 땅바닥에 한 단어만 쓰셨다면 그 단어가 바로 "음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처럼 이 여인에게 사랑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여인의 죄 못지않게 크고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빠져 분노하고 도덕군자 행세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자신의 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기 의의 분노 가운데 이 여인을 정죄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고, 이에 그들은 돌을 내려놓고 떠나갔습니다. 반면, ㅇ수님은 여인을 정죄할 모든 권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은 8장 11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라는 자격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여인에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만드는 데 정죄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심판하고 정죄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도덕군자 행세하지 마십시오! 혹시 어찌어찌하여 죄가 거의 없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예수님이 하신 것 같이 그 지위를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데 사용하십시오! |
골리앗을 두려워하는 백성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블레셋 사람들은 이쪽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쪽 산에 섰고 그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 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전열을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사무엘상 17장 1-11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쟁 발발 이야기입니다. 본문 4절, "규빗"은 보통 성인의 팔꿈치에서부터 중지까지의 길이로, 1규빗은 약 45.6cm입니다. 6절, "각반"은 전쟁의 나가는 병사나 운동선수의 무릎 아래에서 발목가지 보호하는 덮개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싸우려고 와서 진을 치니 이스라엘이 엘라 골짜기에 전열을 벌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지닌 놋 투구, 비닐 갑옷, 놋 단창등의 무게는 엄청납니다. 골리앗은 싸움을 동우며, 한 사람이 나와서 자기와 싸워 이긴다면 블레셋이 그들의 종이 도겠다며 이스라엘을 조롱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1-7절). 요나단의 활약 후 잠시 잠잠하던 블레셋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블레셋이 먼저 도발하니 이스라엘은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양쪽이 대치하는 가운데 블레셋 진영에서 4절, "싸움을 돋우는 자" 골리앗이 나옵니다. 이 "싸움을 돋우는 자"는 양쪽 군대가 팽팽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싸움을 걸거나 상대방 장수와 일대일 결코를 요구하며 기선을 제압하는 사람입니다. 골리앗은 키가 약 3m나 되는 거구이고, 약 57kg 나가는 갑옷을 입었으며, 창날 무게만 약 7kg에 창 자루가 베틀 채만큼 두거운 단창을 가졌습니다. 골리앗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이스라엘이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두려워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도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일대일 싸움을 제안하며 완전 무장을 한 거인 장수 골리앗을 내보냈습니다.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은 골리앗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는 사람은, 갑옷으로 온몸을 방어하고 방패 든 사람까지 준비한 골리앗의 내적 두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익는 비결은 중심을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골리앗(8-11절). 능력의 하나님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용기는 커지고 두려움을 작아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등장만으로도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도발하기 위해 외치기 시작합니다. 골리앗은 이 싸움에 자신과 사울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주지한 후, 자신과의 일대일 대결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자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제안이 아닙니다. "과연 너희에게 나와 싸울 만한 장수가 있느냐"라는 조롱입니다. "나와 싸울 용기가 있느냐? 있으면 나와 봐라!" 골리앗은 자신의 외모와 무장과 협박이 주는 효과를 잘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골리앗에게 겁을 먹고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대상에 집중하는 한, 우리는 두려움으로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골리앗의 모습을 상세히 서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합시다. 또한 무시무사하게 생긴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한 내용은 무엇인지, 현재 우리의 눈과 귀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의 공급자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아버지, 거대한 골리앗과도 같은 위기 앞에서 두려워 떠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의 힘과 능력과 지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원수의 위협과 조롱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갈증과 필요를 주님의 사랑으로 만족시키시고, 끝이 없는 사랑으로 언제나 부족함 없이 우리를 채우실 주님을 개대하고 바라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유일한 두려움의 대상 "도움은 어디서 올까?" 이렇게 기도하는 날이 이따금 있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사랑의 섬김을 하려다 보니 늘 가진 것의 부족을 느꼈습니다. "나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어쩌자고 이렇게 일을 만들었을까? 추가 예산도 미리 준비하지 못했는데 일부터 벌인 게 잘못이었을까? 있는 예산에 맞추어서 그만큼만 했으면 마음 편할 것을!" 이렇게 자문자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합니다. "주님은 감당하실 일만 하셨는가? 결국 사랑과 구원의 과정은 늘 현실의 벽과 한계를 돌파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렇게 사랑은 언제나 멈추어 서지 못하게 만드는 힘인 것을 깨닫습니다. 한때는 세상이 두렵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대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쉽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무엇도 더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남았다면,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남았다면, 하나님을 더 깊이 더 깊이 만나고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삶이 어지럽거나 두려울 때, 큰 일을 앞두고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을 중심에 두십시오.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성령을 따라 걷습니다/이주연 목사) |
이웃을 향한 사랑③ "간음하지 말라"(출애굽기 20:14). 그리스도인은 성(性)이 선하신 창조주의 좋은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 반대라는 생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세기 1:27)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 각자의 성(남성과 여성)이 그분의 창조물이라는 사실과 자녀 출산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두 배우자가 서로 충족되도록 그분께서 결혼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은 공개적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절정에 이르는 일부일처의 결합이자 이성 간의 결합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방금 인용한 창세기의 두 구절을 친히 소개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결론을 맺으셨습니다(마가복음 106-9). 그리고 바울 사도도 남편과 아내의 서로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 5:21-33). 이렇게 중대한 실재들이 성취되었을 때 비로소 성경의 금지 사항들이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하시되, 성적인 즐거움이 허용될 수 있도록 그분이 친히 계획하신 상황이 바로 결혼이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서의 성적인 쾌락에 대해서는 금하고 계십니다. 제7계명에서는 오직 간음만을 구체적으로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혼자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경우, 배우자와 처음 약속했던 정절을 부정함과 동시에 자녀들의 성장에 심한 타격을 주게 되고, 그것은 곧 결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공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성적 부도덕 행위들도 결혼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제7계명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혼외정사 즉 미혼자들 간의 성관계와 혼전 동거 역시 서로에 대한 헌신이 결여된 사랑을 경험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그런 경우 한쪽 배우자는 장기간에 걸친 관계를 바라는 열망이 간절한 반면 다른 쪽 배우자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에게 잔인한 처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동성애에 대해서도, 그것이 이성애의 결혼 관계에 대한 합법적인 대안이라는 "동성애자" 단체의 주장에 대해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넓은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41-42). 능력의 주님! 수용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며, 하루를 이렇게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하루가 된다 할지라도,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용기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제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하루가 된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즐거움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제 의견과 제 뜻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 서글픈 하루가 된다 할지라도, 저 대신 상대방의 의견이 빛을 본 것을 인하여 기쁨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한계상황에 부딪치는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제가 원하는 만족과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 하루가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이에게 평강을 비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영혼까지도 지친 하루를 마감한다 할지라도,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믿으며, 감사의 기도와 찬양으로 마감하는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 제 마음을 주님의 은혜로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자전거 타고 감사 글방을 갈 수 있어 감사 <예림의집 카페> 회원님의 글입니다. 저는 주로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자전거였습니다. 아침저녁 출퇴근용으로 저는 이 자전거를 이용합니다. 저의 서재인 "감사 글방" 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지만 자전거로 5분이면 충분합니다. 자동차를 이용해도 자전거보다는 빠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걸어서 가는 날보다도 자동차로 출퇴근할 때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저는 추운 날이나, 눈,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자전거를 애용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 감사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학창 시절의 향수가 떠올라서 좋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10년은 더 젊어진 것 같아 좋았습니다. 다리 근육도 청년 때처럼 굵어지고 튼실해졌고 건강도 좋아져 여러 모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며 자전거 전용도로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서민들의 정경운 삶이 묻어 있는 동네 골목길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지나올 때면 시골의 고향 길을 지나는 것 같아 푸근하기까지 합니다..!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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