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6771번째 이야기
노부부의 특별한 놀이 어느 노부부의 독특한 놀이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눈" 하면 할아버지는 좀 서투른 몸짓으로 손가락을 자신의 눈 주위에 댑니다. 할머니가 "귀" 하면 할아버지는 귀를 잡고 "배꼽" 하면 겉옷을 들쳐 배꼽을 할머니에게 드러냅니다. 이 놀이를 하며 두 분은 웃다 울 정도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백발이 다 된 노부부가 어린아이처럼 이 놀이를 시작하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는 먼 곳에 살고 있는 손자가 보고 싶었고 손자와 함께 눈, 코, 입 하며 놀았던 기억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의 심정을 잘 아는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부르는 대로 예전 손자의 몸짓을 흉내 냈던 것입니다. 노부부의 특별한 놀이에는 자식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배려하고 위로하려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예림의집TV도 따뜻한 배려가 넘치는 방송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
꽃을 피울 힘! 최강한파가 찾아온 지난 12월의 어느 날 저녁, 칼바람을 뚫고 퇴근해서 집에 오니, 아이가 현관까지 달려와 안기면서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방울토마토에 꽃이 피었어요!” 저는 ‘한겨울에 무슨 꽃이 폈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노란 꽃 다섯 송이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막내아이가 지난해 4월에 식물의 성장과정을 관찰해서 기록하는 숙제가 있다면서 씨앗을 갖고 왔기에 화분에 심은 방울토마토였습니다. 새싹이 나오고 올망졸망 꽃이 피어 열매 맺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이와 저는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잎이 점점 말라가더니, 결국 몇 장 남지 않고 모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생명이 다한 것 같아서 아이에게 이제 그만 이별해야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뿌리를 캐내려고 하자, 아이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직 줄기와 잎이 남아 있잖아요. 살아있을 때까지는 우리가 잘 보살펴줘요, 아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계속 키우기로 마음먹고 화분을 좀 더 따뜻한 서재로 옮겨놨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 직전에 물을 줄 때마다,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면서 차가운 창가에서 살아 버티는 생명의 힘에, 저는 자주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추운 시간을 견디더니, 마침내 이번 겨울에 꽃을 틔운 것입니다. 얼마나 기특하고 신기하던지! 잠깐 꽃이 핀 걸까? 아니면 열매까지 맺힐까? 궁금한 점도 많고, 열매 맺기를 기대하지만,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꽃을 살피는 아이의 얼굴을 봅니다. 여리지만, 포기를 모르는 방울토마토처럼, 앞으로 어떤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제 아이는 결국 "꽃을 피우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꽃피울 힘은 남아 있기 마련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오동희) 그렇습니다. 화석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적어도 몇 천 년 이상 된 어떤 씨앗을 발견했는데, 그 씨앗을 심었더니 싹이 텄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입수한 정보라서, 정보의 정확성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어떤 씨앗이든지 썩지 않는 한, 그 생명은 살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생명은 그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가슴에 말씀을 품고 살면 어떤 환난과 시련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음의 씨를 심고 잘 돌보아서 생명을 구하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
분노의 악순환③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명령의 범위를 확장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를 품고 있다면 자신을 살인자와 비교하며 낫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무도 죽인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분노를 품고 또 표출하여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적이 수없이 많습니다. 언성을 높이고, 욕을 하고, 무례하게 굴고, 상대방에 관해 험담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면이 조금씩은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분노하되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홱 가 버립니다.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이해 그렇게 행동합니다. 말을 하지 않는 수동적인 공격이 분노에서 나온 행동임을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분은 부아가 치밀면 "저기 있잖아!"를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착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미소는 화를 담은 표정입니다. 그는 진정한 "살인 미소"를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화가 날 때마다 "재믿네!"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면 곧 전혀 재밌지 않은 말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가 말을 하면, 웃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또 떤 분은 화가 나면 양손을 쓰다듬으면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먼 산만을 바라봅니다. 내 말은 전혀 귀답아 듣지 않는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합니다. 이 또한 분노의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비록 그들이 실제로 돌을 들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
요나단의 신앙과 용기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사무엘상 14장 1-23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결연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블레셋과 싸우는 요나단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이에 화답하여 이루신 구원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며, 자기 무기를 든 소년과 함께 블레셋을 공격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흩어지고 자기 동무를 서로 치니 그 진영이 혼란에 빠집니다. 거기다가 블레셋을 돕던 히브리 삶이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에서 승기를 얻습니다. 표징을 구하는 요나단(1-10절). 블레셋 군대를 두려워하는 서울과 달리 요나단은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사울도 제사장도 적의 동태만을 살피는 상황에서, 요나단이 부하 한 명 만을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싸우려 합니다. 4-5절, 그곳의 지형이 매우 험했음에도 요나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혹시 하나님이 일하실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그가 대범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울에게 원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적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는 위험한 방식으로 하나님 뜻을 물은 것은 자기 목숨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행위입니다. 6절, 일의 결과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수량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울이 거느린 600명의 군대는 병거 3만 대, 마병 6,000명을 앞세운 블레셋의 병력에 압도당합니다. 블레셋 군사 수아 철제 무기의 위용은 이스라엘에게 공포 자체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기 무기를 든 소년 한 명만 데리고 적진에 들어갑니다. 수적 열세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셈법은 무의미합니다. 승리한 요나단(11-33절). 그리스도인은 주님 말씀에 살고, 주님 말씀에 죽는 존재입니다. 오늘 요나단이 바로 그러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자기들 앞에 나타난 요나단을 조롱합니다. 이때 요나단은 12절, "올라오라"라는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고 블레셋을 자신의 손에 넘기셨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20명을 죽입니다. 14절, "반나절 길이 땅"은 13-18m 거리로, 이는 요나단이 얼마나 재빠르게 무기를 휘둘러서 병사를 죽였는지 강조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전쟁에 참전하십니다. 15절,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진이라는 초자연적 힘으로 블레셋을 치신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워하던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도 요나단의 신앙과 용기에 고무되어 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둡니다. 블레셋과 대치한 상황에서 요나단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려야 할까요? 오늘날 두렵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필요할지 묵상합시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체험한 적이 있는지, 성패를 하나님 손에 맡기고 힘을 다해 행할 일은 무엇이 있는지 묵상합시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문제를 요나단처럼 믿음으로 돌파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다른 것을 의지했던 우리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우리를 대신해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우리는 연약하나 주님은 전능하시는 만사를 주께 맡기고 순복함으로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세상을 이기는 힘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기치를 내걸 당시, 그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맞서야 할 상대는 한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그 싸움에서 실제로 그는 거의 무너질 뻔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그의 주장은 거의 천 년이나 변하지 않고 유지되던 사회, 정치, 문화를 전반적으로 뒤집어 버리는 혁명 자체였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두렵고 떨리는 싸움을 하던 그가 마음에 품은 말은 "코람 데오"였습니다. 라틴어로 "코람"은 "앞에서", "데오"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싸웠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만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결단한 한 사람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하나니만 의지하며 나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살기"라는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면, 인생의 싸움에서도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이 땅에 회복을 가져올 희망입니다.(회복의 빛 예수/안희묵 목사) |
하나님을 향한 사랑⑥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선한 법을 사소한 규정들로 덮어씌우는 바람에 오히려 그 법을 훼손했습니다. 즉 안식일에 허락된 일과 금지된 일을 소소하게 열거함으로 말미암아 그 선한 법의 참모습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규정들의 일부를 고의로 어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규정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고픈 나머지 곡식의 이삭들을 잘라먹었을 때, 서기관은 이는 추수에 해당하는 행위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을 어겼다고 말한 반면에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라는 근본 원칙을 천명하셨습니다(마가복음 2:23-28). 따라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체의 행위를 금지할 것을 강조하는 안식일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예수님도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안식과 경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는 성경의 원리를 당연히 받아들이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일들은 이러한 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또한 안식일에 할 수도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컨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종교적인 일(마태복음 12:5)이라든가, 병자를 치유하는 자선 행위(치유, 9-10절) 그리고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저 내는 일 같은 필수 불가결한 일(11절)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오늘날 성직자와 의사와 농부에게 적용하는 것은 적법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주일 중 어떤 날을 안식과 경배의 날로 지켜야 할까요? 구약의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이었으며, 지금도 제 칠일 안식교인들은 그날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결정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4계 명의 핵심은 날짜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안식하는 리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주의 첫날이 주일로 바뀐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요한복음 20:19, 26). 그리고 이 날이 계속해서 경배로 날로 지켜졌다는 증거가 명백합니다(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1-2). 지금 우리나라는 일주일의 첫날을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며 그날을 안식일로 지키면 됩니다. 혹시, 수요일이나 목요일, 또는 토요일이 국가 공휴일로 정해진다면, 나머지 날은 열심히 일하고, 그날을 안식일로 지키면 될 것입니다! |
축복을 심는 삶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린도전서 10:16). 복의 근원이신 주님! 오늘 하루도 축복을 심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마음이 강퍅한 자에게 사랑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고, 아픔을 당한 자에게 소망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힘들고 지친 자에게 용기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고, 절망으로 탄식하는 자에게 희망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불평이 가득한 자에게 긍정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고, 분열이 있는 자에게 화해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시험을 당한 자에게 감사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고, 갈등을 겪는 자에게 확신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치료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고, 원치 않는 사고를 당한 자에게 위로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실패한 자에게 꿈과 비전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게 하시고, 성공한 자에게 격려의 언어로 축복을 심어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축복을 심는 하루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병상에서의 감사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간곡한 재혼 권유를 물리치고 친구의 사무실을 나온 그는 2층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한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불상사를 당했습니다. 그는 즉시 병원에 입원했고 병상에서 세 가지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이겨낸 것을 마치 자기가 선하여 이룬 것으로 생각했던 불경죄를 깨닫게 되어 감사. 둘째,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많은 친지와 제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됨을 감사. 셋째,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들을 병상에서 조용히 읽을 수 있음을 감사. 그는 기적처럼 아킬레스건이 잘 이어져서 그 후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테니스까지 칠 수 있었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감사의 삶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 중 한 분인 강기려 박사처럼, 감사하는 삶을 살고자 다짐하게 됩니다!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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