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670번째 이야기
1m 철학 세계적인 부호들을 직접 만나며 그들의 성공 비결을 책으로 만든 작가이자 성공철학의 대가 나폴레온 힐의 <나의 꿈 나의 인생>에 담긴 일화입니다. 18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쏟아져 나와 그 해를 황금의 해라고 부릅니다. 그 시절 한 청년도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전 재산을 털어 캘리포니아의 금광을 샀습니다. 금방 부자가 될 거라는 꿈에 부푼 채 열심히 채굴했습니다. 간절함이 닿았는지 트럭을 채울 만큼의 금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큰 실패는 다음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금광맥이 사라진 것처럼 더 이상 금 조각 하나도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청년은 금광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인수한 사람이 청년이 채굴한 지점에서 1m쯤 더 파고들어 가자 노다지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년은 광산을 포기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습니다. 그리곤 이 실패의 경험을 통해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황금보다 더 귀한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청년은 자신만의 "1m 철학"을 정립하고 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 고객을 대할 때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 철학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큰 실적을 올리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성공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패배의 투구를 벗은 시점에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찾아옵니다. "이 정도면 됐"라'는 생각에서 "한 걸음만 더"라는 생각으로 바꾸면 그동안 놓쳤던 성공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은 실패라는 생각의 1m 뒤에 있습니다. |
원하던 대로 살고 있습니까? 이 지구상에는 명령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동물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개구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인간입니다. 동화에 나오는 청개구리는, 엄마개구리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서곤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하려다가도 누가 시키면 갑자기 하기가 싫고, "내가 하나 봐라!" 하면서 심술을 부리며 일부러 안 하려고 합니다. 어릴 적 책상에 앉아있는데, “공부하라!”라는 엄마의 말씀에 “에잇, 안 해!” 하면서 책을 덮어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알 겁니다. 누군가 시키면 하기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데, 명령을 받으면 그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이 명령을 내리고 통제를 가하면, 그것을 자꾸만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봐,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자율성은 인간이 갖고 있는 중요한 본능적 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타인의 간섭과 침입을 막고 내 영역을 지켜서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하는 의사표현도 "싫어!" 혹은 "안 해!"입니다. 갓난아이는 배부르면, 아무리 입에 우유를 넣어주어도, 고개를 돌리고 뱉어버립니다. 자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자지 않고, 조금만 불편하게 안아도 ‘제대로 안아 달라’고 울어댑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이처럼 뭐든지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를, 사회라는 테두리에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심지어, 학교와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여부도 자유롭게 결정하는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 부모님이나 학교가 시키는 대로, 아니면 사람들이 좋다는 길을 가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괜히 내가 원하는 걸 고집했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김혜남) 그렇습니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는, 우리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청개구리성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리고 수없이 거듭 복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시면서, 그 길로만 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반대의 길을 감으로써 불행을 자초하곤 했습니다. 모세시대에는, 심지어 그의 형 아론까지도 모세가 가르쳐준 계명을 앞장서서 거역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의 태도는 가연 어떻습니까? |
분노의 악순환② 당신이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혹은 이들에게 당신 자신의 싫은 구석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이들이 생각하거나 행동하거나 말하거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이 당신을 화나게 만듭니다. 그들이 저지른 짓 혹은 저지르고 있는 짓으로 인해 그들을 당신의 "한 번에 한 사람 명단"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자기 의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로 인해 한 번에 한 사람씩 판단하고 거부하고 정죄하는 데 달인이 되어 어렸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해서 그 사람이 변한 적이 있습니까?" 이는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늘 내가 옳은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미움은 가득한 이 사람을 만나 비난을 받고 나서 내 인생이 완전히 변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비난당하는 기분을 느껴서 당신이 바뀌는 데 도움이 된 적이 있습니까? 정죄가 당신의 변화로 이어진 적이 있습니까?" 절대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애초에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장 4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회개를 이끌어 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자함"입니다. 화난 목소리로 죄를 지적해서는 상대방을 죄에서 건져 낼 수 없습니다. 원망과 미움을 엄한 사랑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미움은 결코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시면서 분노의 심각성을 지적하셨습니다. 분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충격적인 진단을 내리셨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은 사람들을 살인자와 같다고 취급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살인을 한 적도 없고 할 일도 없다." 그러면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자신을 우월하게 여깁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2절에서 그 명령의 범위를 확장시키십니다!(계속..) |
사울의 어리석은 행동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사무엘상 13장 1-12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인간적인 두려움에 빠져 어리석을 행동을 하게 된 사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자, 블레셋이 많은 병거와 마병을 동원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믹마스에 진 치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급함을 보고는 숨고,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오지 않자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가 끝난 후에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이 한 행동을 추구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우리 또한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사울(1-7절). 심령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지 못한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기인합니다. 왕이 된 사울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정규군을 편성하니다. 그동안 필요할 때마다 백성을 소집했었는데, 이제는 자기 후하에 2,000명과 그의 아들 요나단 휘하에 1,000명의 정규군을 두고 적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어느 날 요나단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했는데, 이를 계기로 블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게바는 원래 블레셋 평야에서 먼 내륙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빼앗긴 영토였습니다. 요나단은 이곳을 되찾기 위해 용감하게 블레셋을 공격한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해지자 사울은 온 이스라엘을 길갈로 모읍니다. 그런데 요나단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숨거나 도망갑니다. 적군의 수를 크게 보고,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도한 주위의 환경과 여건에 착념하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시선의 하나님께 고정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한 사울(8-12절). 이스라엘에서는 전쟁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승리의 확신이나 전쟁 방법 등에 관해 하나님께 묻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전재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강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한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제사를 주도할 사무엘이 정한 기한 내에 오지 않습니다. 백성이 두려워하며 흩어지자 사울은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이 지접 나서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대로 드려야 합니다. 사울이 두려워한 것은 싸우기 위해 모인 백성이 흩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백성의 인원수를 더 의지했음을 보여 줍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불순종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순종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이 합당한 지, 혹은 실현 가능하지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순종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일 사울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 사울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점검해 봅니다. 사람이나 환경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변명만 늘어놓았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열심과 열정을 쏟게 하시고, 담대함으로 그 뜻을 이루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신 첫 마음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시간을 믿음으로 기다리게 하시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우리의 영성을 단련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 사람들은 교육이나 경험을 통해 이론과 원칙을 세웁니다. 그런데 종종 이것이 하나님과 그분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견고한 진으로 자리 잡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든 상관없어..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만, 내 생각에는.."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호불호오 상황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하시면 안 된다. 하나님이라면 저렇게 하셔야 한다!"라며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언제나 옳으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옳다. 내가 맞다."라고 고집하는 태도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교만의 극치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틀릴 수가 없으니 남을 탓합니다. 이처럼 반복적이고 치명적인 실수를 거듭하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온전하고 궁극적인 진리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훼방하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하는 모든 이론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것은 말씀의 능력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 앞에 나아가 묵상하고 씨름하며 전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말씀에 점을 찍고 승리하라/이재정 목사) |
하나님을 향한 사랑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애굽기 20:8-11).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는 방식의 기원은 창세기 2장 23절,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라"라는 계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되 이러한 리듬을 지키며 살아야 할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18세기 프랑스 혁명가들과 20세기 러시아 혁명가들이 이런 방식을 바꿔서, 일하는 한 주간을 6일에서 9일이나 10일로 늘리려는 시도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시도들이 그 후에도 있었으나 모두 하나님의 법으로 원상 복귀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에게 억지로 교회에 다니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런 목적을 위해 법을 제정하여 실행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법이 예컨대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스포츠 경기들과 오픈 숍들을 주일에도 운영할 수 있도록 무분별하게 허가해 줌으로 말미암아 주일에도 일해야만 한다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제도를 휴식뿐만 아니라 예배를 위해서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거룩히 드려야" 할 날, 즉 "주님의 날(주일)"이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거룩한 섭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유익을 누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은혜받을 수 있는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과소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날의 시간들을 지혜롭고 유익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회에 출석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눈다거나, 성경공부를 위한 특별한 시간을 보내거나, 유익한 기독교 서적을 읽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나이 드신 친척이나 장애가 있는 친지를 방문한다거나, 여러 형태의 기독교적인 봉사, 예컨대 주일학교 교육이나 흔히 간과되고 잇는 축복인 편지 쓰기 등에 참석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계속..!) |
긍정의 생각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능력의 주님! 오늘도 긍정의 생각으로 사는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설령, 실족케 하는 일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섭리하심을 바라보며 긍정의 생각으로 하루를 살 수 있게 하시옵소서.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들에게도 웃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선물할 수 있게 하시고 어떤 대화를 하든지 언어로 축복을 담아낼 수 있는 모습으로 하루를 살게 하시옵소서. 또한, 어떤 일을 하든지 행위 가운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게 하시고, 창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님은 긍정의 생각으로 사는 자를 통하여 미래를 열어가는 축복의 그릇으로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시대에 꽉 막힌 것들을 시원케 할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오늘도 긍정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부요케 하며, 하나님의 희망을 심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항상 감사하십시오!
옷이 몸에 좀 끼면, 그것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잔디를 깎아야 하고, 유리창을 닦고, 하수구를 고쳐야 한다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것은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면,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아파트 주변에 주차장이 없어서 불편하다면, 그것은 나에게 차가 있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전기세와 난방비가 많이 나옸다면, 그것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세탁물이 많고 다림질할 옷이 쌓였다면, 그것은 내게 옷이 많다는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이른 새벽 자명종 소리에 놀라 깼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 감사하십시오. 모임을 가진 후에 치울 것이 많다면, 그것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이니 감사하십시오. 조금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뿐입니다!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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