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662번째 이야기
그녀가 즐거운 이유 어떤 구두 가게에서 늘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일하는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손님이 구경만 하고 나가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행복한 표정으로 일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다른 직원들이 물어봤는데 그녀는 자신이 관찰한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판매한 기록을 살펴보니 구두를 구매하지 않고 그냥 나가는 손님이 많을수록 구두를 팔 확률이 높은 걸 발견했습니다. 평균을 내보니 열 명의 손님이 그냥 나가면 열한 번째 손님은 구두를 구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님들이 올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손님이 구두를 구매해 줄 열 명의 손님 중에 한 명이 될 수도 있겠구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품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과 현실에 대한 낙담입니다. 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상 무엇보다 빛나는 멋진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
가장 행복한 연주자 물론, 아닙니다. 저 역시, 지면이 모자랄 만큼 많은 좌절과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저의 연주소리가 더욱 깊어지거나 멋진 소리를 내고 있노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그분에 의하여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내는 법을 배웠고,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영원히 변치 않는 유일한 사랑으로, 117개국에서의 연주를 넘어, 지금 저는 연주자가 아닌 물자 배달원, 구조원으로 우크라이나 이곳저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내면에는 그분의 아름다운 연주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주자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가장 높은 곳에 계신 그분과 함께 다니면서 연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을 넘다 보면, 우크라이나 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별똥별을 보게 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그동안 가졌던 전쟁에서의 트라우마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제가 구조했던 수많은 아이들과 엄마들, 노인들의 얼굴에 비친 안도의 미소, 함께 한 동지들이 있을 뿐입니다. 현재 제가 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현지 창고는 7개인데, 그중 가장 큰 곳에서는 약 48명이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3월 초부터 직원들에게 소정의 월급을 지급했는데, 그들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창고 앞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들도 난민이고 전쟁 피해자인데.. 오늘 최전방에 물자를 전달하다가 내일 죽을 수도 있는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잃은 그들이, 그 진실과 만나는 순간, 저는 끝없이 작아졌습니다. 세상에 없는 평안과 사랑이 그들 얼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송솔나무/플루티스트) 저는 이 글을 읽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송솔나무 님은 세계적인 플롯 연주가입니다. 그러니, 그 험한 전쟁터에서 봉사하지 않아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의 연주회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총탄이 언제 날아와 그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세계 117개국에서 연주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의 내면에는 그분의 아름다운 연주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연주자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누군가를 돕는 사람입니다! |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태복음 5:40). 잠깐요, 예수님! 누군가가 제 뺨을 때리면 복수하지 말고 다른 뺨도 대라고 하셨죠? 싫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소송을 걸어 제 몸에서 속옷을 벗겨 가면 제 겉옷도 주어야 한다고요? 제게 소송을 건 사람에게 제 옷을 예쁜 쇼핑백에 담아서 주라고요? 이건 단순히 다른 뺨을 대는 것과 같은 평화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 아닙니까? 잔인함을 친절로 갚아 주라니요? 그것은 너무한 요구 아니신가요?라고 대드는 사람도 있을 법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속옷을 몇 벌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겉옷은 대게 한 벌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겉옷은 쌀쌀해지는 밤에는 담요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 22장은 모든 사람에게 겉옷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겉옷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가지는 것을 기본적인 인권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겉옷을 빼앗으려는 소송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때로 자신의 권리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 가르침에 관해 생각하다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겉옷을 양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할머니에게는 양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추위에 떠시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내가 추운 편이 낫습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은혜를 갚아 줄 사람에게는 기꺼이 자신이 겉옷을 내줄 것입니다. 하지만 소송을 건 사람에게 겉옷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이런 종류의 반응에는 세상이 주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쯤에서 앞서 다루었던 재판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대입해 보면 그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에게 소송을 건 사람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고소인의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고소인을 위해 기도한 기억도 없습니다. 고소인이 예수님을 알았는지 혹은 교회에 다녔는지 전혀 모릅니다. 고소인이 그에게 소송을 걸기 전에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고 그가 목사인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뒤로 목사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는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소송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일단 고소인을 찾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가 고소인을 적이 아닌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기회로 여겼다면? 섣불리 그를 방어하려고, 그 권리를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에 소금을 더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겉옷까지로 가지게 하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
홀로 싸우시는 하나님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사무엘상 5장 1-12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블레셋 땅에서 홀로 싸워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2절, "다곤"은 물고기 도는 곡식(옥수수)이란 뜻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풍요의 신으로 숭배했던 우상신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가져다가 다곤 신전에 둡니다. 이후 다곤 신상은 하나님의 궤 앞에 엎어지고 잘리며, 하나님은 아스돗 사람들을 독한 종기로 치십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 가는 가드와 에그론에도 제앙이 계속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싸워 승리하신 것입니다. 다곤 신상을 부수심(1-5절). 모든 난관과 고통, 우리의 한계와 실패를 하나님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승리로 바꾸십니다. 고대에는 나라 가느이 전쟁을 그 나라 신들의 전쟁으로 여겼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아스돗의 다곤 신전 안에 들여놓습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 하나님을 이긴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승리를 만끽하던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 날 다곤 신전에 가 보니, 다곤 신상이 마치 하나님께 복종과 헌신을 표시하듯 언약궤 앞에 엎어져 있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이 잘린 채로 문지방 위에 놓여 있습니다. 패배자의 머리와 두 손을 자르는 것은 승리자가 행하는 고대 관습입니다. 이렇듯 다곤이 하나님 앞에 패배하고 넘어져 파괴된 모습은 하나님이 전쟁의 참승리자가 되심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나서 블레셋에 패배하고, 언약궤를 빼앗겼지만, 하나님께서 홀로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신 위에 뛰어난 참신이심을 알게 된 사건은 무엇인지 묵상합시다. 블레셋 땅에 재앙을 내리심(6-12절). 전능하신 하나님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해 블레셋과 싸우심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대적 가운데로 들어가시고 그분의 영광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손"으로 블레셋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다곤을 부수신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십니다.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에 점염병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이 재앙이 언약궤에 계신 하나님의 공격이라 판단하고 언약궤를 가드로 보냅니다. 하나님은 가드에 더 심한 재앙을 내려 9절,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독종이 나게 하십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다시 에그론으로 보내지만, 에그론에서는 재앙이 더 심각해져 많은 사람이 죽고 병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언약궤를 옮겨 갈수록 재앙이 더 심해지고,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하나님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기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일은 무엇인지 묵상합시다. "블레셋 땅에서 홀로 싸우시사 승리하신 하나님 아버지, 택하신 백성의 범죄로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되어도 스스로 영광과 존귀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매 순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아무리 암울하고 비참하게 느껴질지라도 절대 패배했다 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꼭 붙잡고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언제나 하나님이 이기신다 G.K. 체스터턴은 <영원한 사람(The Everlasting Man)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유럽은 몇 번이나 뒤집어졌고 매번 이런 변혁의 끝에는 똑같은 종교가 다시 정상에서 발견되었다. 기독교는 언제나 옛 종교가 아닌 새 종교로서 시대를 변화시킨다. 아리우스파, 인본주의적 회의론자들, 볼테르와 다윈 때문에 기독교는 만신창이가 되곤 했지만 그래도 죽지 않았다. 오늘날 기독교는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럴 만도 하다. 하나님은 무덤에서 나오는 길을 아시는 분이니까 말이다." 강력한 무신론자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자기 병실 문 앞에 걸린 십자가에 관해 깊이 고민했더라면, 죽음을 앞둔 자신의 모습과 십자가를 번갈아 바라보았더라면 이 진리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땅에 없고, 기독교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 진리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거짓과 이단, 적들이 아무리 강해도 진리는 그것들보다 오래 삽니다. 진리를 아무리 숨기고 핍박하고 모욕하고, 심지어 죽이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최종 결고는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적이 누구든 무엇이든, 언제나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혼돈에서 질서를, 불신에서 믿음을, 죽음에서 생명을 끌어내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서도 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 강하십니다.(무신론자들의 마음속/앤서니 데스테파노) |
그리스도인의 선교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로 연합하게 하시며 부흥케 하시는 동일한 성령님께서는 세계 복음화도 주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선교의 영이십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7장 38-39절, 예수님은 "생수의 강"이 모든 신자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요한은 이것이 성령을 가리켜 말슴하신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내용은, 사도행전에서 더욱 풍성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오순절 성령 강림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수도인 로마로 끝이 나는 전 세계에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을 증인으로 파송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엄밀히 말해서 선교의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행전"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선교사들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문적인 의미의 타문화권 선교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리 모두가 가정과 직장과, 친구와 이웃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으며,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이 절재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사도행전 1:8). 지역 교회도 선교에 헌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역 선교 즉 전도와 전 세계를 향한 교회의 복음 전도 사역에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세계 선교, 이 두 가지 선교에 모두 헌신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천성적으로 부끄러움이 많고 말도 잘 못하기 때문에 증인의 책임에 대해서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소심하던 시골 어부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사도행전 4:13, 31). 바울도 동일한 체험을 했습니다. 비록 그는 능력 있는 지식인이었지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눈도 좋지 않고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물됨과 말솜씨가 모두 형편없다고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고린도전서 2장 3절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웅변술이나 세상적인 지혜를 의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전하셨으며, 위대한 능력으로 그 말씀들이 청중의 머리와 가슴과 양심과 의지 속에 평안히 자리 잡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영국 성공회가 막 태동했던 복음 전도의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위험 요소는, 우리가 잘못된 것들을 의지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능력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영, 성령님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이것만이 선교의 성공 비결입니다! |
은혜를 구하는 기도 아버지, 제게 아버지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른 어떤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오늘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날인 줄 믿습니다.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아버지,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에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남편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은혜가 충만하게 해 주옵소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크신 은혜로 함께해 주옵소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은혜가 넘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제가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옵소서. 제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제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주옵소서. 하나님, 이 땅을 하나님의 은혜로 감싸주옵소서. 이 나라에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게 하옵소서.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땅의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날마다 더해주시옵소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제게 가득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제게서 흘러넘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크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은혜로 넘쳐나게 하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은혜로 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은혜로 함께하신 하나님 사랑합니다. 은혜로우신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의 말을 들은 밥은 향기롭다 어느 실험 이야기입니다. 밥을 똑같은 두 개의 유리병 속에 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유리병에는 "감사하다"는 글귀를 붙이고 다른 유리병에는 "망할 자식!"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두 명의 초등학생엑 그 글귀를 각각 병에 대고 읽게 하였습니다. 즉 "감사하다"가 붙어 있는 유리병을 향하여서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망할 자식"이라고 붙어 있는 병에 대고는 망할 자식이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지속하고 보니 "감사하다"라는 말을 들은 밥은 발효가 되어 향기로운 누룩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나 "망할 자식"이라는 말을 들은 밥은 부패해서 검은색으로 변하여 악취를 풍겼습니다. 이 실험은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의 힘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향기로운 인생이 되기 위해 과연 우리는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할까요? 감사의 말로 향기 있는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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