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메일 모음

예림의집 2497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22. 2. 24. 11:49

예림의집 2497번째 이야기

따뜻한 하루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그리스에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재물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덕망 있는 한 철학자와 남자가 만나게 되었고 그는 철학자 앞에서도 자신의 부를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철학자는 세계 지도를 펴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그리스가 어디인가?" 그러자 그는 지도 위 조그만 반도를 가리켰고 이어서 철학자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어디 있는가?" 이번에는 지도 위 겨우 점 하나로 표시된 아테네를 가리키자 철학자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자네의 토지는 어디 있는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남자의 대답과 함께 이후 그는 더 이상 재물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진 것에 겸손한 자세를 갖지 못한다면 결국 자만에 빠지고 내가 가진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유한 재물이나 지식이 얼마나 티끌 같은지 알게 된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도 항상 감사하며 넘치는 것에 절대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예림가족 이야기

몸이 보내는 신호..!

그녀는 발레를 전공한 무용수였습니다. 활동량이 많은 시기, 오히려 당시엔 자신의 몸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혹사시키고 홀대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쓸모 있어야 하고, 아름다워 보여야 한다는 것은,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 대신, 내면으로부터 몸을 바라봐야 욕구와 감정에 따라 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 탓에 습관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어서 불행하게도 자신의 몸에 살이 쩠다고 합시다.
날씬해 보이기 위해서 그냥 무작정 음식에 손을 대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본 것입니다. 반면에, 내면으로부터 몸을 바라보면 불안의 원인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내면으로부터 바라봐야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어요. 이 신호를 무시하면, 어느 순간 무기력해지거나, 우울감에 빠지거나, 에너지가 소진되기 마련입니다.” 그녀에게 몸은 곧 ‘자원’입니다. “우리 몸에는 브레이크 기능도, 액셀 기능도 있어요. 그 기능을 잘 사용하려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몸이 방어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쓰거든요.
신호에 따라 호흡과 피부를 두드리는 것처럼, 사소한 활동부터 춤추기, 땀 흘리며 운동하기 등으로 액셀을 밟거나 브레이크를 거는 거예요. 이를 통하여 ‘방어에 쓰는 에너지’를 ‘창조하는 에너지’로 바꿀 수 있어요.” 일상에서 몸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호흡에 주의 기울이기"입니다. 불편한 상황과 마주하면 호흡이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이를 눈치채면, 잠시 심호흡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거나, 그런 상황과 거리를 두는 등, 대처할 수 있습니다. “후유~” 하고 길게 소리 내면서 날숨을 뱉어보시기 바랍니다.(정정화)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몸은 우리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건만, 자기 몸이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 다루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몸을 주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께서 우리 몸을 안전하게 지켜 보호해 주실 겁니다. 하루에 세 번은 심호흡을 합시다. 이때, 내뱉는 숨과 소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 정도 깊게 호흡하면서, 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안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단장 칼럼

기독교의 핵심 진리 83-화체설

사실, 오늘 주제 화체설은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어제의 저의 강의에 대해 반문하시는 분도 있고, 알아두면 유익하기에 오늘 나누어봅디다. 교회 생활에서 성만찬을 기념할 때보다 더 엄숙하고 거룩한 순간은 없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문제는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개혁주의의 선구자들(루터, 칼빈, 츠빙글리 등)도 해결하지 못한 영역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화체설"을 가르칩니다. 오늘은 화체설에 대해 집중해 다루어 봅시다.
화체설은 "의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가 성찬식 도중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떡과 포도주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우리 눈에 여전히 떡과 포도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로 변화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기적을 이해하려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알아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이 "실체(substance)"와 "양태(accident)"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체는 가장 깊은 본질, 즉 사물의 "원료"입니다. 그리고 양태는 사물의 외적, 표면적 모습입니다.
그는 사물과 그 사물의 양태 사이에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성만찬에 쓰이는 빵과 포도주는 그것이 갖는 실체와 양태를 모두,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이 한 사물의 실체를 갖는 동시에 다른 사물의 양태를 갖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양태를 갖고 기적이 일어난 후에는 떡과 포도주의 특성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많이 복잡하게 느껴지겠지만 이 정도가 화체설을 가장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체설을 둘러싼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몸과 피는 예수님의 인성에 속한 것입니다. 즉 세계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성찬식을 거행한다면 예수님의 인성(몸과 피)이 어떻게 같은 시간에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무소부재의 능력은 신성이지 인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성이 동시에 전 세계로 미치려면 그 인성의 신격화가 필요합니다. 루터와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이 능력을 인성으로 전달하여 그 인성이 한 장소에 한정됨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 한 장소 이상에 임재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칼빈과 다른 신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불법으로 여겼고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속성인 인성과 신성이 혼합, 혼란, 분열, 분리됨 없이 각각의 속성을 고유하게 보유한 채로 연합되어 있다고 확언하며 화체설이 이단의 한 형태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는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찬송가 부르기

 

오늘의 Q.T.

탕자를 향한 아버지 사랑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장 11-32절).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로 설명하신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입니다. 16절의 "쥐엄 열매"를 맺는 쥐엄 나무는 콩과에 교목으로, 약 25cm 되는 뿔 모양의 열매 속에 단맛 나는 알갱이가 8-9개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드십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탕진하고 주립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는 그를 환대합니다. 이를 본 큰 아들의 불평에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다시 얻었으니 기뻐하는 게 마땅하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과 아버지(11-24절).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십니다. 유대 사회에서 재산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관례를 무시하고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꾸짖지 않고 재산을 줍니다. 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이방인의 돼지를 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택하신 죄인들은 내쳐진 종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을 때까지 찾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공동체에서 내처 진 구제 불능한 존재처럼 취급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찾기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이 할 일은, 찾아오시고 손 내미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납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묵상합시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25-32절)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둘째 아들은 이방인 또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두 팔 벌려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이제는 첫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자기중심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맏아들은 밭에서 돌아오는 길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까지 베푼 것에 분노합니다. 그러고는 아버지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온갖 불평을 쏟아냅니다.
12절에 분명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알지 못합니다. 이 비유에서 맡아들은 바리새인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두 아들(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먼저 믿은 자와 나중에 믿는 자)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품어야 하는 마음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영혼을 향한 너그러운 이해와 포용하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포용해야 할 지체는 누구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아주시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곁에서 누리는 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집 떠난 이의 죄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 소유가 다 자기 것이 되는 특권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 이의 죄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고백합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즐거워하게 하시옵소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귀한 잃어버린 자녀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

 

그리스도인의 삶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성경 비유를 통해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죄인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예화는 이와 대조적입니다. 성경에서의 "탕자"를 불교에서는 "방자"라고 합니다. 한 방자가 집을 떠나 오랜 세월 허랑방탕하다가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나 처절한 고생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서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자신이 그의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볼 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점점 책임감 있고, 사려 깊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해 갔습니다. 아들의 변화에 만족한 아버지는 그제야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밝히고는 아들을 공식적으로 자기 친아들이자, 상속자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은혜"라는 개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탕자 이야기에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인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김양재 목사)

 

가정교회를 말하다

가정교회의 변천과 종말③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교회가 개조된 가정집이나 또는 다른 독립된 건물을 소유하고서부터 "교회"라는 용어가 건물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어제 언급한 위경 클레멘티네스의 Recognitiones과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심지어 유세비우스는 312년 두로에 세워진 교회당 봉헌 설교에서 그 교회당을 이스라엘의 성전에 비유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그 용어가 하나도 예외 없이 교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신약성경 시대에는 독립적인 교회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당 건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공인 당시 로마 제국 안의 그리스도인의 인구는 약 10% 정도로 추산되나, 그 수는 곧 크게 증가했습니다. 4세가 초 콘스탄티누스의 전임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시대 동안의 교회당들이 파괴와 기독교 공인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수적 증가로 인하여, 교회는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당은 소위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직사각형의 건물로, 한 지역의 교회 또는 대도시의 한 구역의 교회 전체를
포함하기에 충분한 큰 건물이었습니다. 바실리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것들은 사각형 형태의 입구인 아트리움, 회중석, 그리고 성직자의 좌석이 있는 성소입니다. 이런 교회당의 출현과 함께 교회는 그때까지 존재했던 가족적인 가정 공동체의 교회 구조를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예배 의식도 일부 궁중 의식을 받아들여 더 장엄하고 더 고정화되고 더 제사장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제 교회의 삶은 많은 점에서 대규모였으나 추상적이기도 했습니다. 친밀하고 가족적이고 실제적인 교회의 삶은 상실되었습니다!

기도의 횃불

빛을 얻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줄 모르고 살아왔던 우리에게, 이제는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이 임하기를 기다리며 지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전에 뜰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던 자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하셨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빛을 비추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빛 되심의 진리를 묵상하게 하시고, 주님이 예비하신 깊고 놀라운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햇볕이 방 안으로 들어오듯이 주님은 사람의 심령 안으로 들어와 그 자신을 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누구에게나 들어오십니다. 우리에게도 들어와 주셨습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의와 생명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췬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시옵소서. 아담의 타락 이후,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지내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도 없고 의와 거룩의 도덕성도 없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지낼 뿐이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심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주님의 빛과 생명이 약속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빛이신 주님께 우리를 맡기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강권하여 붙들어 주사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삶을 주님께 내어드려 맡김을 시작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자녀를 삼아 주시는 약속을 주셨으니, 살아가는 동안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옵소서. 빛의 삶으로 천국을 받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의 노래

복음 쪽지~㉾

순종..!


우리가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내고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순종이 주는 유익 또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안테나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잡기에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안테나를 세워 주님의 소리를 듣는 방법 한 가지는 "주님, 제게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합시다!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