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의 변천과 종말②
이 새로운 가정교회 모임 장소 중의 하나가 1931년에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위치한 두라-유로 포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두라-유로 포스의 전형적인 주택이었는데, 안뜰과 8개의 내실이 있고, 내실 중의 둘은 하나의 큰 모임 장소로 변형되었습니다. 이 변형된 방의 크기는 5.15 X 12.9 미터로, 65-75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큰 내실이 생겨난 연대는 벽에 남아 있는 낙서로 보아 232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내실에는 세례용 물통이 있었고, 벽에는 선한 목자, 가라앉는 베드로 등 여러 가지 성화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개조된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진 가정교회는 3세기 말까지 여전히 중심을 이룹니다. 261년 경 갈리에누스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예배 장소들을 교회 감독들에게 복구시켜 주라는 칙령을 내렸을 때, 그 예배 장소들은 거의 틀림없이 개조된 가정집들이었을 것입니다. 화이트는 그런 교회당이 어떤 지역에서는 5세기까지 잔존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3세기 중엽 이후에 또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개조된 가정집과는 다른 별도의 교회당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249년에 황제가 된 데시우스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250년부터 기독교를 혹독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 251년 고트 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데시우스가 죽자 그의 친구 발레리안이 황제가 되어 전임자처럼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그도 곧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260년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산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면서 정책을 바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단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디오클레티안에 의해 핍박이 재개되기까지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평화의 시기에, 특별히 270년에서 303년까지, 개종자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고, 그에 따라 여러 지역에 별도의 교회당이 건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3세기 말에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건물에 만족하지 않고 건축 기금을 사용하여 모든 도시에 큰 교회를 건설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소 과장된 것이 사실이지만, 콘스탄티누스 이전에 아마도 일종의 바실리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건물들이 이미 존재한 것 같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런 건물들 안에는 일반적으로 성직자의 자리와 평신도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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