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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나의 기도

예림의집 2022. 1. 7. 21:43

편지는 나의 기도

강창원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어머니께서 온돌방 윗목에 정한수 한 그릇을 떠놓고 정갈한 차림으로 기도하는 날이면 나는 편지를 썼다. 내가 열 살쯤이었을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앞못보는 어머니께서 육군 보병으로 휴전선 근처 최전방에 나가있는 둘째 아들의 안녕을 소원하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천지신령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기도를 끝낸 어머니는 “요즘 꿈이 뒤숭숭한 게 전방에 있는 네 형이 걱정되는구나. 네가 안부 편지 한통 써보내려므나” 라며 써야할 내용을 요약해 주셨고 나는 열심히 형에게 그 내용을 적어 보냈다. 그 편지는 어머니의 기도문이었다. 우체부 아저씨가 군 사우편 도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오면 나는 지체 없이 어 머니께 읽어드리는 것이 나의 임무이었다. “그 봐라. 네가 편지를 그리 잘 써 보내니 천지신명도 감화되어 네 형을 잘 지켜 보호 해주시는 거야”라는 어머니의 칭찬에 나는 어깨 가 우쭐해지곤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편지를 잘 쓰는 어 린이로 소문이 났다.

학교에서 연말이 되면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썼 고 글쓰기를 잘 못하는 반 친구들을 위해 대신 써주는 대서 소 노릇을 하곤 했다. 덕분에 내 주머니에는 대서료로 받은 알사탕이 푸짐해지기도 했다. 군복무을 마친 형과 함께 서울로 삶의 터전이 옮겨지면, 서 편지 쓸 경황도 없고 필요도 없게 되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세상 흐름에 따랐고 내 삶은 ‘낮에 는 공장, 밤에는 야간학교’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생활고와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야간고등학생 처지에 무 슨 장래 꿈이 있었겠으며 누구에게 삶의 넋두리를 적어 보낼 염두가 났겠는가.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 울 구세군 자선냄비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고 있 는 외국인 젊은이들과 서투른 영어로 몇마디를 나누다가 나도 외국 학생들과 편지교환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외국 학생들과 편지교환을 돕기 위한 소개소를 찾았고 미국 북다코타(North Dakota)주의 한 여고생을 편지교환 상대 즉 펜팔(pen pal)로 소개 받았다.

펜팔과의 편지교환은 나의 영어 실력의 향상을 가져왔고 대학진학은 물론 외국 유학의 꿈을 키워 주었다. 이 꿈은 결국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으로 이어졌다. 편지쓰기는 마침내 북다코타주에 사는 펜팔과 그 가족들 을 만나는 행운도 가져다주었다. 군제대 후 천주교에 나갔 고 기도 중 영안이 열렸기에 미국 유학 시절에도 성당을 찾 았고 거기서 사귄 분들과의 교제로 영어 편지쓰기는 점차 늘어갔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휴대폰이 없는데다가 서구 인들의 편지쓰기에 나도 회신으로 응답해야 했기 때문이 다. 서구인들에게는 편지쓰기가 너무 자연스럽고 생활화 되어 있어서 그들의 삶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들의 편지에 는 항상 ‘당신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원 한다’라 는 축원이 맺음말이고, 그 축원이 거칠고 험난한 내 삶의 여정에서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다.

 

서구인들의 편지쓰기 문화는 부럽고 놀라웠다. 시간이 나 경제적 여유와는 관계가 없다. 어린 자녀 서너 명을 키 우며 직장생활에 눈코뜰새 없이 바쁜 젊은 부부, 손이 흔 들려 글쓰기가 불편한 90대의 노인, 여행 중인 여행객 모 두 틈 만나면 편지를 쓴다. 이들의 편지는 대부분 짧고 간 결하다. 그리고 받은 편지로 인한 기쁨과 행복감이 대화 의 주제이다. 200여년 전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편지가 2만여 통으 로 추산되며 후손들이 회수해서 서간집으로 출판된 것만도 15,000통 이상 된다고 한다. 문학가 괴테만이 아니다. 훗날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생사를 오가는 전쟁 터에서도 아내 조세핀에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지낸 날은 하루도 없었소’라고 썼고, 어머니에게는 ‘어머니, 제 가 끝까지 지탱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세요’라고 썼다 고 한다.
세계 최강의 로마제국을 건설한 16대 황제 아우렐리우 스(Aurelius)가 그의 10대 후반에 스승인 30대 후반의 프 론토(Fronto)에게 보낸 연애편지는 20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동성애 논란과 함께 그의 치열했던 삶이 화제가  곤 한다.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 다. 당신의 불타는 사랑은 저를 벼락 맞은 사람처럼 멍하 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무튼 그의 어린 시절 편지쓰기 로 인하여 현대인에게도 불멸의 고전으로 익히는 ‘아우렐 리우스의 명상록’이라는 저서를 남긴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편지라면 단연코 신약성 경 27권 중 절반을 이루고 있는 13통의 바울서신 일게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첫 머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 는 기도로 시작되고 편지 말미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 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하심’의 축원으로 끝맺는다. 이 를 본받아 서구인들의 편지는 늘 수신인을 위한 축복으 로 끝을 맺는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이다. 그러 기에 사도바울은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 도의 편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말에도 편지를 천리 면목(千里面目)이라 하며 천리 밖에서도 얼굴을 보는 것 이라고 표현하였다. 편지쓰기는 받는 사람을 위한 기도이 며 축원이다. 휴대폰과 누리소통망(SNS)의 발달로 손으로 쓰는 편지 쓰기가 점차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나는 가끔 나이든 옛 친구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들은 그들을 위한 나의 기도문이다. 영국시인 존 슨(S. Johnson)이 그의 시에서 말한 것처럼 “무덤에 들어 가면 편지를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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