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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반짝이는 별..​

예림의집 2021. 12. 22. 21:40

약속; 반짝이는 별..

박미혜 작가

살면서 우린 얼마나 자주 밤하늘 쳐다볼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고개를 들 만큼의 여유를 스스로 갖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40대 초반까지 나 역시도 날이 선 채로 매일 시간을 쪼개며 종종걸음을 하며 지냈었다.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 그때도 밤 9시가 다 되어 일을 마치고 귀가를 하면서 올려다본 검은 하늘이라 생각한 그곳에서 빛나는 별을 만나게 되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며 길벗이 되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하늘에 별만 쳐다보다가 그리운 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내 맘 깊숙한 곳에 만들어 놓은 마음 서랍에 있던 큰엄마였다.

나의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군인이란 직업 특성상 경기 도, 강원도 전방 부대로 이사가 잦았고 연년생으로 둘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하며 부모님을 애 태웠다고 한다. 고심 끝에 아버지는 나를 본가가 있는 철원 집에 위탁하셨다. 당시 큰엄마는 아이가 없었던 터라 아버지 손에 안겨 온 조막만 한 아이를 마음으로 안아주셨다고 한다. 자식이 없었던 큰엄마는 젖이 나오질 않아 쌀뜨물을 끓여서 떠먹이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정성으로 키워 주셨다.

하지만 집안에 장남인 큰아버지는 대를 이을 손을 낳지 못하는 큰엄마에 대한 원망과 집안 어른들에게 송구함으로 자주 다툼을 하셨다. 평상시에는 그저 넋두리로 삭이시던 응어리가 오일장을 다녀오시며 걸친 약주의 힘을 빌려 원망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겪고 있는 동안 나는 큰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마을 개천을 잇는 다리에서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산골이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며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때엔 집집이 굴뚝 연기가 피어오른다. 저녁을 짓고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찾는 소리 가 여기저기 들리면서 말이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돌아갈 집에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어둠이 찾아올 때쯤 큰엄마가 플래시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 불빛을 따라 집으로 뛰어간다. 큰엄마는 늘 집 마당에 있는 마루에 누워계시며 몇 시간의 고단함을 잊으시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품에 파고들어 같이 누워있는 것이다. 취학통지서가 나오자 큰아버지께서는 공부는 부모 밑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부모님이 사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6년여를 따로 지내다가 찾아온 여동생을 한 해 위의 언니는 낯설었다고 한다.

학교를 다녀오니 여동생이라며 소개한 나의 존재가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학교를 입학하고 부모님은 여름 겨울 방학 때면 나를 큰 집에 데려다주셨다.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이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적적해하실 형님 내외분을 위한 배려 가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큰아버지의 소란스러운 푸념 은 여전하셨다. 그렇게 반복되며 마지막 연례행사처럼 마루에 누워 밤하늘 바라보던 어느 날 큰엄마가 흥얼거리며 부르시던 노래가 바로 ‘약속’이었다. 당시에 그 노래가 왜 그리 슬프던지, 밤하늘의 별이 반짝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엔 일렁거림만 보였다. 어린 나의 마음으로는 큰엄마의 슬픔을 짐작하지도 위로하지도 못하며 손만 잡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큰엄마가 당부처럼 내게 해주신 말씀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미혜야, 너는 꼭 나중에 너를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 만나서 아이 셋 낳고 재밌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큰엄마는 스스로 짊어진 멍에에서 잠시 잊을 그 시간에 함께해 준 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같은 여자이면서 내가 겪지 말았으면 하는 당부를 그렇게 표현해 주셨다. 어느덧 당시 큰엄마의 나이가 되고 불현듯 바라본 하늘에서 다시 그때가 떠오른 것이다.

별이 유난히 밝았던 그날도 내겐 큰엄마의 당부처럼 사랑받는 이의 삶보다는 고단함으로 매일을 살던 가장의 삶이었다. 하늘과 별을 바라보는 어릴 적 마음과 집집이 굴 뚝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행복한 보금자리를 꿈꿔주셨던 큰엄마의 바람과 약속을 잊은 채로 말이다. 큰엄마의 마지막을 맞게 된 중환자실 병동에서 난 의식이 없이 고통 속에 신음하시던 큰엄마의 귓가에 ‘미혜는 괜찮으니 이제 편안하게 가시라’는 말밖에 해드리지 못했다. 바람처럼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말을 끝내 전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회상하던 시간도 흐르고 이제 50을 넘기며 내겐 반짝거리는 희망이 찾아왔다. 살면서 무던히도 염원하고 바라는 소망들을 지키려 애썼던 몸짓과 마음보다 더 간절한 약속.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보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당신의 마음을 더 한 그날 밤의 약속 우리는 각자 마음 서랍에 그리움 한편씩 새기고 담아 놓는다. 그 서랍을 열고 마주하게 되는 그리움은 누군가와의 약속이며 여전히 우리에게 등불이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반짝거리는 희망이다. 오늘은 그 서랍을 열고 그리움 한편과 함께 밤하늘 어딘가에 있을 큰 엄마와 노래를 불러야겠다. 푸른 꿈을 꾸는 미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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