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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편지​

예림의집 2022. 2. 17. 11:23

나에게 쓰는 편지

이맹윤 교수

편지를 쓰는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나를 성장시키는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너도, 나도 펜팔을 했다. 학원이란 월간 학생 잡지에 이름과 주소를 올리면 편지가 오기도 하고 보내기도 했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풋풋한 이성의 호기심과 감정을 해소하는 낭만적인 공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펜팔로 받은 편지 두 통을 가 지고 왔다. 맘에 드는 편지는 자기가, 나에게는 맘에 들지 않는 편지를 주었다. 나는 몰래 친구 편지 봉투의 주소를 외웠다. 답장은 나에게만 왔다. 그렇게 시작된 펜팔은 여학생에게 말 한번 걸지 못했던 내 청소년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되었다. 봄에 시작된 편지는 한 달에 2번 정도 오갔다. 그 여학생은 모눈종이에 마음으로 칸을 채워가듯이 편지를 썼다. 반짝이는 연필로 꽃과 예쁜 인형 그렸고, 단풍잎을 붙이고 팝송 가사를 적기도 했다. 편지를 받을 때마다 설렘이 행복이 되었다. 책을 좋아하던 나는 감성적인 글, 아름다운 시를 찾아서 적어 보내야 했다. 책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내 평생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시절이다. 지금도 잊지 않는 글귀가 있다. 양주동 박사님이 쓴 수필이다. ‘정말 지혜 로운 사람은 손해 보는 듯 산다.’ 마음 넉넉해지고 수용의 폭이 넓어지는 지혜로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해 하얀 눈이 내리는 성탄절, 그 여학생에게서 소포가 왔다. 스크랩북이었다. 노트를 가득 채운 그동안 주고받은 글과 그림들, 꽃과 나뭇잎으로 장식한 10개월의 아름다운 여정이 담겨있었다. 푸시킨의 시가 적힌 하얀 모시 손수건 한 장이 책갈피에 넣어 있었다. 기쁨의 감동이 밀려왔다. 서늘한 냉기가 돌던 자취방에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담감이 밀려왔다.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선물을 하지 못했다. 나는 더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꽃 피는 봄에 시작된 편지는 그해 겨울 멈추었다. 그러나 나는 그 스크랩북을 소중하게 간직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곤 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마음이 그립다. 사춘기 방황의 시절. 독서를 하며 차분하게 정서와 감성을 키워준 아름다운 추억이다. 스크랩북에는 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 마음에 드는 내용을 다시 쓰고는 ‘친구가 나에게 보내준 글’이라고 썼다. 여학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책의 내용을 발췌해서 썼어도 그건 나를 성장시키는 글이었고 생각이었고, 내가 나를 위해 쓴 편지였다. 편지 쓰기는 나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었다. 오늘 이렇게 글로써 작은 봉사라도 하게 된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편지는 자유로운 영혼의 노래다. 편지는 상대방에게 쓰지만 나에게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어떤 형태든 모두가 갇힌 상태를 경험한다. 군대, 병원, 학교, 직장, 역할과 책임, 심리적 부자유 등도 일종의 갇힌 상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구속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많은 심리 학자는 태도라고 한다. 내 안에 있는 자유로운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이다. 그 생각과 태도를 엽서에 기록하여 편 지를 쓴 사람이 있다. 그분은 수백 통의 엽서 편지를 가족들과 지인들에 보냈다. 그 편지는 책이 되어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책이 되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쓰는 것 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생각으로 수도 없이 쓰고 지우고 고쳐서 외워 한순간에 엽서에 작은 글씨로 채워 넣으셨다 고 했다. 그 편지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지만 당신 자신에 게 쓴 편지였다.

편지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나의 다 짐이 되어 나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기도 한다. 아름다운 흔적이 되고 삶의 무늬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연결이 중단된 시대라고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시 대를 초연결 시대라고도 한다. 연결이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은 사랑하는 한 사람, 그분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편지로 맺은 연결은 언제까지고 기억으로 남아 위로와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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