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조망: 종교개혁 이후의 운동②
다음 인물은 "후안 드 발데스(1500-1541년)"입니다. 유태계 태생의 젊은이 발데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복음주의" 또는 "발도파"로 알려진 평신도 운동에 앞장선 핵심 지도자였습니다. 발데스는 20대 초반에 페드로 루이츠 드 알카라츠가 인도하는 소그룹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는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임은 비형식적이었고, 남녀 모두 참석했으며 많은 유대인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발데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한 알카라츠의 급진적인 교회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발데스는 후에 <그리스도인의 교리에 관한 대화>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은데, 그는 이 책을 통해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과한 철저한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1531년에 몰수되었고, 종교재판 결과 금서로 지정되어 발데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결국 그는 이후 아탈리아로 피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마지막 10년 동안 나폴리에서 공동체를 시작했고, 매주 주일마다 개인 가정에서 성경공부와 기도를 위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또한 복음서에서 가르침을 받은 데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함께 노력했습니다.
발데스는 종교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사로잡은 동시에, 시장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바울 서신을 토론하는 것을 우연하게 들은 시장의 제혁업자들도 그의 개념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약 3,000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발데스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추종자들은 교황이 주관하는 종교재판이 재개되면서 도망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공동체는 "재세례파(1520년경)" 이 운동은 전 가톨릭 사제이자 스위스 개혁자였던 울리히 츠빙글리의 주위에 모여들었던 제자들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톨릭의 수많은 종교적 관행들에 오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교황의 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나 취리히 의회에서 도시의 공식 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로 인해 사람들은 정부의 과세정책뿐 아니라 교회의 예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도시 의회는 교회 안의 광범위한 변화에 대한 츠빙글리의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은 그를 물러나게 했습니다. 미몽에서 벗어난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과 친구들, 특히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맨츠는 취리히 근처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전 사제이자 열정적인 개혁가였던 조지 블라우락과 힘을 합해 성경을 읽고 토론하며 성찬을 나누는 비밀 가정교회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유아세례를 받은 성인들에게 다시 세례를 행했는데 이것이 더욱 성경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6개월 이내에 이 운동은 마을과 도시로 뻗어나갔고 다른 스위스 지역과 독일에까지 번졌습니다. 이러한 재세례자들 또는 재세례파는 츠빙글리와 정부 권력으로부터 비난과 박해에 직면했습니다. 콘라드 그레벨은 탈출과 고된 여정 끝에 장기가 투옥되어 쓰러졌고, 결국 전염병으로 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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