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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조망: 종교개혁 이후의 운동④​

예림의집 2021. 11. 25. 14:25

역사적 조망: 종교개혁 이후의 운동④

오늘 두 인물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 단락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먼저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5년)"입니다. 경건주의 창시자이자 잔 드 라바디의 제자였던 스페너는 개인의 영적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갈수록 학문적이고 열매 없는 독일 루터파 교회에 대한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주요 전략은 주일 예배를 보충하여 만인제사장 원리를 실행하는 일명 "경건 모임"이라 불리는 소그룹 가정 모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나 교수들은 이런 모임에 참여하여 제자 훈련과 경건에 초점을 맞추어 봉사했습니다. 그의 이런 운동에 많은 이가 호응했습니다.

스페너는 기존 교회를 자극하길 원하길 원하지 않았고 또한 이런 모임이 전통적인 교회를 대처하기보다는 보충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세례나 성찬을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펜서가 시작한 초기 모임은 결국 그의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억압받았고 그 후 그는 냉소적이 되어 다시는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 를 통해 그의 영향력은 모라비안과 경건주의자들에게 미쳤고 이들은 18세기 대부흥 기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영향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인물은 "존 웨슬리(1703-1791년)"입니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로서 다양한 교구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에 그는 옥스퍼드로 돌아왔고, 상호 책임, 기도, 성경 공부, 성찬, 그리고 구제사역을 위해 형제인 찰스와 친구인 조지 휫필드와 함께 작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갔지만 열매 없는 사역으로 인해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채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영적으로 충만케 되는 내적 체험을 하면서 웨슬리는 야외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감리교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50년 동안 웨슬리는 자신의 야외 설교를 통해 회심한 수천의 사람들을 6명에서 12명의 셀 모이므로 모아 상호 책임, 제자도 훈련, 병든 자를 돌보고, 가난한 자를 돕는 모금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웨슬리는 그러한 회심자들을 적합한 지도자와 함께 셀모임으로 조직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소그룹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회자요 제자훈련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러한 "속회" 모임은 멤버들의 가정에서 모이면서 가정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강의식 설교와 찬양을 위한 연합 모임(신도회)으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셀모임의 회원들만이 이러한 대그룹의 신도회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운동의 결집을 위해 순회 목사들이 도시와 도시를 돌아다녔습니다. 모임은 전통적인 영국 국교회 예배와 충돌하지 않도록 계획되었습니다. 웨슬리는 분리된 새로운 운동을 만들기보다 영국 국교회 안에서의 회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1791년 존 웨슬리가 죽었을 때,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운동은 대략 만 개의 가정 셀모임과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불어났습니다. 이상, 다양한 운동을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