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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조망: 종교개혁 이후의 운동(1500년 이후)①

예림의집 2021. 11. 22. 14:14

역사적 조망: 종교개혁 이후의 운동(1500년 이후)①

 

복음주의와 은사주의를 포함한 대부분의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16세기의 격동기를 돌아볼 때마다 서유럽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신학적으로 정화되던 시기라고 간주합니다. 교회사는 이 시기를 "종교개혁"이라고 부릅니다.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믿음에 관한 중대한 재발견(신학)을 촉발했음에도, 그들은 이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구조를 거의 바꾸지 않은 채(교회론) 그것을 새로운 개혁교회에 그대로 도입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변화가 충분하다고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의 기치를 내건 이들은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로서 교회의 형태와 역할에 대해 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고나서 온건한 종교개혁자들이 미처 준비되기도 전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습니다. 소위 급진주의자들로 불린 그들은 단순히 사도들의 신학으로만 돌아갈 게 아니라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실행으로 돌아감으로써 교회를 병들게 했던 문제의 핵심을 더 깊이 파고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루터와 츠빙글리 같은 로마 가톨릭과 대립했던 온건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반대와 비판을 받았습니다.

먼저, "마틴 루터(1483-1546년)"를 살펴봅시다. 이 유명한 독일 개혁자는 좀 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드리는 세 번째 예배 의식이 라틴어와 독일어로 드리는 공적 미사를 보완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모임의 목적은 기도와 성경 읽기, 세례, 성찬, 상호 책임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 등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결국 이러한 생각을 전부 거부했는데, 그러한 모임이 자기들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생각에 관심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고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가정 모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험한 반대론자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조롱하고 박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으로는 "카스파르 폰 쉬벤크벨트(1490-1561년)" 입니다. 영향력 있는 귀족이었던 쉬벤크벨트는 사업에 종사하던 사람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는 신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30세가 되었을 때, 루터의 강의를 접하고 영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고향 실레시아에서 개혁의 심장이요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루터의 애제자였지만, 쉬벤크벨트는 그의 선생과 강하게 대립하는 바람에 불법적인 개혁자요 공식적인 이단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쉬벤크펠트의 간절한 바람은 교회의 신앙과 실행을 개혁하는 일에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기 원한다면 성경 특히 사도행전을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최초의 교회 모습이 어떠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칭찬받고 용납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저는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따라서 그는 루터에게 로마 가톨릭의 교회론과 다를 바 없는 교회론에서 벗어나도록 간청했고, 루터는 그러한 요청을 강하게 비난하고 박해했습니다. 쉬벤크펠트는 이후 30년 동안 유럽에서 루터파 사제들에게 쫓기는 수배자가 되었고, 그 와중에 기도와 성경공부에 초점을 맞춘 가정교회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를 쫓는 사람들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모임에서 세례나 성찬을 권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 루터파 목회자들은 수많은 쉬벤크벨트 추종자들에게 국가 교회로 되돌아갈 것을 강요했고, 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