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32번째 이야기
아주 작은 아이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많이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즉 이웃과 동료, 가족의 안정을 추구할 때 우리에게 참된 쉼은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 향하면서부터 주님 안에서의 평안과 안식에 눈뜰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인정받고 싶어 울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속 사람을 힘들게 하고 괴롭힙니다. 이 아이와의 이별을 해야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아주 원초적인 용어로 저를 놀려대던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재활원에서는 이런 일로 마음을 다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중학교로 진학한 후, 목발을 짚고 다리를 끌면서 걸어 다니는 저는, 어디서나 아이들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동정의 시선도 있고, 호기심의 시선도 있었으며, 경멸의 시선도 있었습니다. 그 눈초리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저는 견디기 힘든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그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내려면 무감각을 연습해야 했습니다. 뜨거운 물속에서 ‘이건 안 뜨겁다’고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았습니다. 정신력으로 견딘다고 해도, 살이 데이고 상처가 남습니다. 상처 위에 다시 상처가 덧입혀져 무감각해질 때까지 버티는 동안, 어느덧 저의 마음은 딱딱해지고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대학에 들어와 성경공부를 하던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온갖 모욕을 당하시는 구절들을 읽었습니다. 마치 제가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헤롯은 ‘무슨 굉장한 이적이라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을까?’하여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삼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힘써 고소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희롱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도, 강도를 비롯해서 지나가던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욕을 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저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분이 당해야 할 모욕이 아니지 않습니까? 온몸이 찢기는 고통 중에서 말입니다. 결론은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김인강 교수) 그렇습니다. "장애인의 아픔을 정상인이 이해한다."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어쩌면, 그의 부모, 특히 어머니만이 그 아픔을 제대로 알고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주께서 당하신 고초를 장애를 가진 김 교수님이기에 그 누구보다 더 절절하게 동감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김 교수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그 장애를 하나님의 은혜로 승하시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2장 18절 말씀입니다. ![]() |
기독교의 핵심 진리 23-언약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의 기본 구조는 언약입니다. 언약은 보통 계약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계약과 언약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 중요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구속력을 가진 합의입니다. 계약은 다소 평등한 위치에 있는 쌍방이 체결하는 것이며 양측은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언약도 마찬가지로 합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언약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대 근동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과 같습니다. 일종의 강제적 언약인 것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은 정복하는 왕과 정복당하는 자들 사이에 맺어집니다. 즉 쌍방 간 협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첫 번째 요소는 각각의 조항들을 열거한 언약의 전문(前文)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은 2절, "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이 지배자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피지배자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역사적 서문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지배자(하나님)가 그의 성실함을 입증하기 위한 일을 열거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내신 일가 같은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분을 말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율법의 중심이요, 나아가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요구 사항의 엑기스라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계명은 언약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을 도덕적으로 구속합니다. 언약 형태의 마지막 부분은 "축복과 저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다섯 번째 계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부모를 공경하면 약속의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백성들이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지 않을 땐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공존합니다. 특히 신명기 26-30장에서는 여러 번 반복하여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을,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에게 하신 언약, 그리고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 사이의 언약에서 이러한 양식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구약시대에는 언약이 인준되었습니다. 두 당사자가 동물의 쪼개진 몸 사이로 지나가면서 언약에 대한 합의를 표명했습니다(예레미야 34:18). 창세가 15장 7-21절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니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동물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인증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을 성취하시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하시며 쪼개진 동물 사이로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반면 새 언약, 즉 은혜 언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증되었습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 모두에게 구원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을 가장 거룩한 맹세로 인봉하시고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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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경청의 자세가 위로의 시작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욥기 21장 1-16절). 우리는 전장인 20장에서 나아마 사람 소발이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욥은 악인이 장수하며 세력이 강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되묻습니다. 어떤 악인의 후손은 굳건하고 집안도 평안하며 가축도 날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스올에 내려갈지라도 전능자를 아는 것도, 주님의 도리를 아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욥은 이런 악인의 계획이 자신과는 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악인이 아닙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2절,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라고 요청합니다. 내 말을 잘 들으라(1-6절).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잘 경청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법입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먼저 자신의 말을 잘 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위로가 되겠다고 합니다. 3절,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라며 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간청합니다. 이는 조롱을 하더라도 충분히 듣고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대화에서 얼마나 친구들이 욥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욥의 말입니다. 경청은 사랑과 긍휼을 불러오는 시작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이 누구를 향하는지 알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욥의 이러한 탄식은 사람인 친구들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기에 그는 초조해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얼마나 참혹한 지 제대로 봐 달라고 호소하며, 친구들의 긍휼을 구합니다. 친구란 상처 난 부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고 격려하는 존재입니다. 고난당하는 지체를 정죄하기보다 그의 괴로운 심정을 들어주는 것이 왜 필요한지 묵상합시다. 왜 악인은 오래 살고 번영을 누리는가(7-16).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한 상황이 펼쳐지곤 합니다. 욥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악인이 장수하고 번영하는 모습을 목도합니다. 그들의 후손도 대대로 굳건히 서는 복을 누립니다. 그들의 집에 임하는 것은 9장 34절의 하나님의 막대기가 아니라 평안이며, 그들의 가축까지 번성합니다. 악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닌, 복과 번영을 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멀리 떠나시기를 바라고,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깁니다. 지금의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듯 욥은 하나님의 복 주심 없는 잘 됨이 있기도 하고 하나님 없는 고통이 나타나기도 하며, 구원자 없는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악인에게도 선한 것을 주신 까닭에 욥은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악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 즉 구원을 그분이 택하신 백성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16절, 악인의 계획을 거부합니다. 이는 신앙에 굳건히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에게 경청의 가치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 막막해 보여, 악인의 형통함을 내심 부러워했음을 고백합니다. 악하게 사는데도 잘 되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형벌임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더 순전한 믿음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잠시뿐인 이 땅의 풍요함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과 비교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고난당하는 지체를 정죄하기보다 그의 괴로운 심정을 잘 헤아리게 하시고, 현재의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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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답이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수만 가지 질문과 수만 가지 답으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까닭에 정작 참된 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적대감과 좌절감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참된 답을 평생 수없이 찾아 헤매는데 계속 가짜 답만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구두 상자 위에 서서 수만 개의 구두 상자를 바라보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답이 든 상자 위에 서 있으면서도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는 탓에 평생 엉뚱한 상자만 뒤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답은 얼을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생의 기초이자 답이십니다. 그분만 발견하면 우리의 모든 혼란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눈앞이 환해지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그분을 배제하면 혼란에 사로잡혀 답을 찾기가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혹독하게 인내하면서 끝도 없이 자기 힘으로 노력하는 삶을 살 뿐입니다. 반면 참된 답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얻은 사람은 혼란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요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비춰 주시는 그 길로만 가면 됩니다. 그 길이 진리로, 생명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빛이 없는 동굴 속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눈앞에 있는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그런 동굴은 불이 켜져야 그 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런 동굴과도 같습니다. 당장이라도 불을 들고 들어가 동굴을 탐험할 수 있는데, 왜 평생 빛을 찾아 동굴 속을 더듬고 다니려 합니까? 평생 답을 찾아 수만 가지 질문의 미로를 헤맬 수도 있고, 먼저 답을 들고 질문을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라는 정답을 들고 모든 질문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요, 행복이요,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답입니다!(마이클 웰즈 목사) ![]() |
초기 교회는 어떻게 하나의 교회가 되었나?② 두 번째로는 "사도들의 서신"입니다. 사도들이 방문에 따른 가르침을 보충하기 위해 서신을 통한 교제가 계속되었고 지역 교회 신자들에게 전달된 서신들이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른 성도들에게도 전하여 같이 읽도록 했고, 그들이 정확한 복사본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4장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이 구절을 볼 때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라오디게아 편지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서신이 개별적으로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 시켰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장 15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3장 14절,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런 서신 전달로 육체적인 위험은 줄었지만, 좀 더 교활하고 잠재적인 위험요소가 존재했는데, 이런 사역에 으레 따라오는 속임수였습니다. 바로 이단을 통한 교묘한 위조와 현혹된 가짜 서신들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특정 가르침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파하고자 서신을 위조하는 개인이나 단체들의 시도가 분명히 존재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2절,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가짜 복음과 가짜 편지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가정 대 가정의 만남"입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또는 한 도시 교회와 다른 도시 교회와의 연결입니다.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특정 도시나 지역에서 여러 가정교회들의 면대 면 만남이 있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이런 역할을 하는 가정 대상 사역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오순절 직후,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수천 명이 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가정에서 가정으로" 서로 만나며 집에서 함께 떡을 떼고 먹었습니다. 이는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여러 구절들을 보면 한 모임이 다른 모임을 방문하고, 수많은 가정 교회가 모임을 위해 자신의 가정을 공개했으며, 개인들은 하나의 모임 이상에 참석했습니다. 이러한 모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도들의 별다른 지시 없이도 상황에 따라 결정되고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는 없지만, 직접적이고 자세한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서신서의 여러 곳을 볼 때 간접적으로 이러한 상황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 대 가정의 만남은 한 가정씩 교대로 돌아가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가정 교회도 연합과 교제의 방편을 준비하며 계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정교회가 서로 연합되고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
사랑과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를 따라 만물을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 풍요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주님께 방송으로나마 예배드릴 수 있는 이 복된 시간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주님께 예배하는 저희의 심령마다 주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우셔서 예배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예배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풍성한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보내게 하시고,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특히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시며, 끝이 없는 사랑으로 대하시는 그 깊은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사랑의 열매를 더욱 많이 맺을 수 있는 이 가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감사의 열매도 많이 맺기를 원합니다. 기쁘고 좋을 대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험한 가시밭길을 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재물이 많고, 인정을 받으며, 형통함을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삼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 깊이 감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가을에 성령의 열매가 가득 맺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영적인 창고에 영적인 열매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 모두가 신령한 복을 늘 구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미련한 돼지처럼 하늘의 신령한 복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같이 되지 말게 하시고, 하늘의 복을 소중히 여김으로 신령한 복을 늘 구하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절대적 성품인 사랑과 감사가 늘 넘치게 하시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사랑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으로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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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에서 열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슬럼프가 없는 게 아니라, 슬럼프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고난의 깊은 밤에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도록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에도 압도되지 않고 끝내 인내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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