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27번째 이야기
연합..! 연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더 잘 되기를 빌어주고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방을 높여줄 때, 비로소 사탄이 우리의 사역 가운데 방해하기 위해 침투하려는 통로를 막을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연합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서로의 사역을 축복하시고 놀라운 사역의 길을 열어가시리라 믿습니다. 여러 내려놓아야 할 것들보다 훨씬 더 내려놓기 힘든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마치 양파껍질 같아서 벗긴 것 같으면 다른 껍질이 있고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발견됩니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높이는 삶이 됩시다! ![]() |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저는 지금도 심장이식을 받은 사람임을 알려주는 표식을 목에 달고 다닙니다. 이 목걸이는 혹시라도 제가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의식을 잃으면 누군가가 신속하게 응급 대처해 주기를 바라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저는 샤워할 때마다 거울을 통하여 이 목걸이를 보면서 저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욕심이 생길 때마다 이 목걸이를 보면서 초심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새 삶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고 남을 용서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저의 인생을 의탁하곤 합니다. 작년은 저에게 특별한 해였습니다. 저는 두 번째로 심장에 이상이 생겨서 쓰러졌을 때 히스기야의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렇게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습니다. 작년은 그때로부터 꼭 15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심장 거부 반응을 막기 위한 약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혈압을 조절하고 콜레스테롤을 조절하는 약도 먹고 있습니다. 1년에 두세 번은 반드시 주치의와 만나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대개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은 10년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두 번째 심장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평균수명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의 심장에 왜 이상이 생겼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저의 심장이 언제 다시 또 문제가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문에, 저는 매 순간 주님의 은혜로 사는 시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1년을 주시든, 15년을 더 주시든,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죽음을, 이전보다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정했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하형록) 그렇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언제 죽게 될는지, 그 날짜와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 죽을 날짜와 시간을 모른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맘 편히 살 수 있어서 다행이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치열하게, 정성을 다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 |
기독교의 핵심 진리-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우리는 매일 "공정"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 법정에서 판결을 내릴 때 그 말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공정이라는 말이 두루 쓰이는 만큼, 그 말을 적당하게 규정짓기 원했던 철학자들은 혼란을 겪어왔습니다. 대로 우리는 공정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 혹은 그 사람이 이룩한 것에 관련시켜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상아라는 것은 반드시 공적이 있을 때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미인 경연 대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미임이 상을 타게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공적 때문에 받는 상이 아닙니다. 다만 가장 아름다운 후보자에게 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데 공정이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입니다. 한 철학자는 공정을 "각 사람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란 윤리적 의무, 혹은 선행되는 몇 가지 동의 사항에 따라 결정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가 받아야 할 분량보다 심한 벌을 받았다면 그것은 불공정합니다. 또 쌓은 공적에 미치지 못하는 상을 받았다면 그 상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공의가 "정의"에 국한되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주권과 속성,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을 포함합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며 그의 모든 뜻과 사역 역시 공의롭습니다. 그렇다면 자비와 공의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간혹 자비와 공의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분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자비란 잘못을 범한 자에게 벌을 덜 줄 때, 혹은 상 받을 자에게 더 큰 상을 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향한 자신의 엄한 공의를 자비로 누그러뜨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유보시키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아무 공로 없는 우리의 순종에 상을 주십니다. 자비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자비로워야 할 의무가 없으십니다. 오직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은혜를 베푸실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9장 15절에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고루 베푸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대의 어떤 이방인에게도 보이시지 않았던 방법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가룟 유다에게 나타내셨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메섹 도상의 바울 앞에 은혜로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자비와 은혜는 불의한 처사가 아닙니다. 유다의 형벌이 마땅히 그가 받아야 할 형벌보다 심한 것이었다면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유다도 은혜를 입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가 하나님에게 요구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은혜로우셔야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시다면, 우리는 이미 은혜가 아닌 공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공의란 의(義)에 기초하여 정의됩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그가 옳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 25절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이 뻔한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사도 바울도 로마서 9장 14절에서 동일하게 질문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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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중에 꿈꾸는 불가능의 가능성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욥기 14장 13-22절). 욥의 처절한 호소는 계속됩니다. 함께 읽은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자신을 숨겨 주시고 기억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모든 고난을 참고 기다릴 테니 자신의 죄와 허물을 봉하시고 싸매 달라고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산이 무너지고 물이 티끌을 씻어 버리듯, 사람의 희망을 한순간에 끊어 버리시는 분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욥은 점점 하나님에 대한 바른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한 면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18-22절). 절망적 상황에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욥은 자신을 "스올"에 숨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구약성경의 시편 139편 8절, 아모스 9장 2절 등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욥기 7장 9-10절과 10장 21절 등을 볼 때 스올은 되돌아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스올을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은신처"로 묘사합니다. 이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욥은 그의 고통 가운데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동시에 인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인간에게 현실을 능가하는 소망을 품게 하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욥은 진노가 그치면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앞선 15절에서 언급한 "부름"과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회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극복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 속에 소소한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곧 구원하실 분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는 하나님(18-22절). 하나님의 권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산과 바위는 탁월함과 견고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능력 앞에는 무력합니다. 19절, 욥은 물이 돌을 닿게 하듯, 하나님이 사람의 소망을 끊으신다고 한탄합니다. 자신에게 있던 견고한 믿음과 소망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소망을 끊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난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믿음과 소망을 더욱 선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은 물이 돌을 닳게 하고 땅의 티끌을 쓸어 가듯 하나님은 사람의 희망을 끊으신다고 합니다. 희망을 끊는다는 것은 절망적 상태로 만들거나 생명을 끊어 버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인간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시며, 얼굴빛을 변하게 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현실 세계로부터 단절시키기에 살과 영혼을 가진 모든 인간은 현실 세계에서 고난이 가득한 삶을 살아갑니다. 욥은 고난의 실존과 죽음 사이에서 하나님 앞에 탄식합니다. 육체의 고통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묵상합시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의 희망을 끊어 놓으셨다고 항변하는 욥의 모습에서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몸부림을 봅니다. 홍수가 티끌을 쏟아버림같이 인간적인 모든 소망이 사라져 버린 자리에서, 참 소망되신 주님을 만나 생명이 피어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평소에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무장하여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잊어버리지 않고 극복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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탓에서 뜻으로..! 신학 대학에서 종교 철학과 철학 개론을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켰습니다. 고난에 대해 조별 토론을 했는데, 한 학생이 "고난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게는 그 말이 다소 안일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네가 고난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서 깊이 생각해 본 것이 맞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 학생 말대로 고난이 복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고통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통 안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 말해야 정확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반응하면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연약해서 종종 남을 탓합니다. "남 탓"이 "내 탓"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내 탓"은 자기혐오와 수치심을 유발하고 절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 "하나님 탓"을 합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고난을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탓"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만이 내게 닥친 사태를 진정시키실 수 있는 분임을 잊은 처사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탓하는 내가 바로 내 인생을 망치는 장본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고난을 허용하실 수도 있고 감해 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최선이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신이라는 것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탓하지 말고 뜻을 따라갑시다!(김기현 목사) ![]() |
초기 교회의 지도력은 어떠했을까?③ 오늘은 초대 교회의 재정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지역 지도자를 재정적을 지원하는 부분이 있었을까요? 쉽게 말해서 오늘날처럼 사례비를 받는 전문 지도자가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는 1세기에 사례를 받는 지역 장로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도시에 있는 장로에 관해 동역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장로들은 그들의 노고에 대해 "두 배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 입에 재갈을 물리지 말아야 하듯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규적인 월급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이 구절에 사용된 "존경"은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40번 넘게 사용되고 있는데 "존경" 또는 "가치"의 뜻이 있지만 재정과 관련된 의미는 없습니다. 임금이나 급료 그리고 월급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신약성경에 38번 사용되지만 "두 배의 존경"이라는 구절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지역 장로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의 본을 따라 물질적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다정히 격려했습니다. 장로들은 교회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했지, 뭔가를 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어떤 경우에는 장로들에게 전임의 사례를 주라고 권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면 중대한 모순이 될 것입니다. 셋째, 초기 가정교회에서는 유급 지역 장로들을 고용할 실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3-4명의 작은 팀으로 구성된 자발적인 장로들은 회원 수가 30명을 넘지 않는 신약의 가정교회에서는 쉽게 구성될 수 있었고, 그들이 공동체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것으로 교회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따라서, "두 배의 존경"이라는 구절에는 재정적 지원이라는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고 대신 장로들이 봉사하고 지도하는 사람들로부터 정당하게 받는 높은 존경, 감사, 그리고 칭찬 같은 보상을 의미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만일 장로가 개인적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거나 가정교회가 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자 원한다면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자비량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존 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역자들에게 사례비를 주는 것은 어떠한가요? 그것은 사례비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지요. 생활비입니다.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오직 생명을 구원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전념하기로 헌신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사역자들에게는 부의 축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교회도 없으며, 내 재산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존을 위해 교회를 통하여 돌보시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
빛을 비추는 삶이 되게 하소서!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주님! 이 시간 저희들이 방송으로나마 주님 앞에 나와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예배하는 모든 이들의 각 처소에 가득함을 깨닫습니다. 저희들이 온 맘과 온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예배하고 주님을 높일 수 있게 하시옵소서. 주님께 경배함이, 주님을 찬양함이, 우리 각 처소뿐 아니라 온 땅에 가득하게 하시옵소서. 주님! 이 세상은 어지럽고 어수선하지만 이리도 세월이 흘러 2021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 그 농도를 이기지 못하여 우수수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계절에 저희들이 일어나 이사야 60장 1절의 말씀처럼 빛을 발하는 믿음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마태복음 5장 16절에 말씀하셨사오니 빛의 자녀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복음으로 구원의 빛을 비추는 삶이 되게 하시고, 착한 행실로 참 빛이신 주님을 나타내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믿음의 지체들에게는 섬김의 빛을 비추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는 충성의 빛을 드리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 이 나라의 경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오래도록 지속되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한파로 인하여 국민들이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얼어붙은 경제를 다시 실라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한번 얼어붙은 경제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한숨소리만 커져가고 있사오니, 이 나라 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망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이 나라의 경제를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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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해, 우리가 감사를 모르고 살아온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감사치 않은 자신의 죄에 대해 "어찌할꼬?" 하는 사람마다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 싫고, 기도하기 싫고, 주님과 대화하기 싫습니까? 그렇다면 당신 안에는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살았고, 십자가와 더불어 죽었다는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감격과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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