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24번째 이야기
그 종이를 찢으라고 하셨다..! 선악과를 다 먹은 행위는 하나님이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내가 판단의 주체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을 판단했던 것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그 종이를 찢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실천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씩 내 안에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는 한, 우리는 영적으로 순결해질 수도, 건강해질 수도 없습니다. 판단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판단하려고 합니다. 판단의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판단하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 |
내가 주인인가, 휴대폰이 주인인가? <뉴욕타임즈>는, 애플의 창업자인 고(故) 스티븐 잡스가 "생전에 자녀들이 집에서 컴퓨터나 태블릿 PC와 같은 기기들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라는 내용을 기사화했습니다. "누구나 태블릿 한 대씩은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그였지만, 유독 자녀에게는 엄격했다는 겁니다. 잡스 말고도 첨단기술을 다루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 또는 벤처 기업가들도 비슷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캐나다>는 "평균적인 인간의 집중력이 12초"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13년 후에는, 금붕어가 집중하는 9초보다도 인간은 1초가 모자란 8초라는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저자 애덤 알터 교수는 "인간의 기술 발달에 따라 새로운 중독이 시작되었다."라고 하면서, 지금까지는 술, 담배, 마약과 같은 물질중독이 있었다면,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빠르게 퍼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 유튜브, SNS, 온라인 쇼핑 등을 행위중독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먼저, 예방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왜 디지털 중독을 경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예방하는 방안들을 알아본 뒤, 온 가족이 함께 그것을 지키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자각(自覺)입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디지털 중독에 빠져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제의 나"를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제 사용시간을 확인해보고 그것을 작성해봐야 합니다. 일단, 이렇게 자각했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디지털 계획"을 세워보는 것입니다. 내가 휴대폰을 사용해야 할 시간과 이유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정해놓은 시간 외에는 휴대폰을 따로 보관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튼, "내가 휴대폰의 주인이지, 휴대폰이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기(氣) 싸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파이팅합시다!(고충숙) ![]() |
기독교의 핵심 진리⑮ 하나님의 전지하심 "전지"라는 단어는 "모든 지식을 갖는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오직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만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한한 피조물의 지식은 유한한 존재에 의해 제한받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므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이해하시며, 모든 것을 파악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배우시거나 새로운 지식을 얻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완벽하게 알고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 무엇에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그 본질부터 철저하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논리 체계로 일하신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진부한 문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학을 하다가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특히 모순되는 두 가지 사항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논리 체계에 호소함으로써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모순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아!"라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추론은 기독교에 있어서 독과 같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논리 체계를 가지셨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보기에 모순되는 것이 하나님께는 논리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신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떤 구절이든 하나님께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정반대의 의미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선과 악도 하나님께는 우리의 생각과 반대가 되거나 적그리스도도 참그리스도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초월적인 지식으로 우리에게 당혹감을 주는 신비들을 푸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의 정도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지식의 "본질"이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합리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모순을 풀어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역시 그분의 전능하심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것은 초월적 지능으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열심히 연구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로서 그의 피조물인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을 다스리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모든 것을 모른 채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의 다른 특성과 마찬가지로 그 두 가지는 상호 의존적으로 전체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전능하심, 그리고 편재하심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영원히 아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컴퓨터가 파일을 검색하는 것처럼 정보를 "호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양쪽에 날이 선 칼과 같습니다. 이 개념은 신자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혹해하는 문제들도 하나님은 당혹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이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들의 죄는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아담처럼 숨으려 하지만 그의 사랑 안에서든 그의 저주 아래서든, 이 우주에 하나님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 앞에서 숨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아십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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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의원 같은 무익한 친구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욥기 13장 1-19절). 함께 읽은 본문은 자신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세 친구에 대한 반발입니다. 욥의 이 변론은 마치 저주에 가깝습니다. 욥은 자신도 친구들만큼은 알고 있다며, 전능자와 변론하겠다고 말합니다. 욥에게 친구들은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쓸모없는 의원일 뿐입니다. 친구들이 하나님을 위해 변론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재 같은 속담에 불과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결국 의롭다고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는 욥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들에 대한 욥의 평가(1-13절). 상처의 원인을 잘못 짚어 내면 쓸모없는 의사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 속에서 자신의 이해력이 친구들에게 뒤지지 않음을 밝힙니다. 그러나 1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끝이 없습니다. "다 보고 듣고 깨달았다"라는 욥의 주장은 섣부르고 오만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38-41장에서 욥의 무지함을 폭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욥은 42장 5절에서 자신이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더 온전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욥은 이제 3절에서 하나님과 변론하려 합니다. 친구들과의 논쟁에서는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기 전에 욥은 친구들이 어떠했는지 진술합니다. 그들은 4절,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쓸모없는 의원입니다. 여기에는 실망감과 더불어 신랄한 비난이 담겨 있습니다. 욥은 5절, 그들이 차리리 침묵하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2장 13절에서 보였던 그들의 처음 행동처럼 말입니다. 친구들의 말은 "재 같은 속담", "토성(흙) 같은 방어"일뿐이기에 생명력이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 당하는 친구에게 어떤 친구로 평가받을까요? 하나님께 변론하는 욥(14-19절). 욥은 두 가지 비유적 표현으로 자신의 결심과 기대를 피력합니다. 14절의 "내 살을 내 이로 물고"는 동물이 새끼 혹은 먹이를 자기 이로 물어 가져오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절의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라는 말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는 주인공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사사기 12장 3절, "...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에서와 같습니다. 비슷한 비유를 반복함으로써 욥은 자신의 처지와 마음이 어떤지 보여 줍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이 있을지라도 15절, 하나님 앞에서의 변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와 결단을 보입니다. 또한 18절, 자신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을 확신하기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적절한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을 믿고 탄식으로 항변합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무지한 자는 교만해 이처럼 만용을 부리지만, 지혜로운 자는 말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 갑니다. 오늘날 불의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변론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경험과 생각보다 더욱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거짓을 속삭이는 허망한 자들의 소리로는 영혼의 위안을 얻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기에 끈질기게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당한 일을 아뢰며 전능자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옵소서. 어떤 말씀이든 달게 듣겠으니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것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게 하시옵소서. 주님을 날마다 알아가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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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wec국제선교회에 엘리엇 테퍼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나라에 중독 회복 기관과 교회를 개척했는데, 도중에 아홉 살짜리 아들 디모데가 교통사고로 죽는 참혹한 일을 겪었습니다. 사고는 엘리엇이 자녀들을 데리고 모국인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날 엘리엇의 아내 메리는 다른 지역으로 강연을 떠나면서, 남편에게 아이들과 여행을 가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불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걱정하지 말라며 네 명의 아이를 함께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건의 화근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이 운전을 했고 옆자리에 막내 디모데가 앉았습니다. 엘리엇은 뒷좌석에 둘째로 셋째를 데리고 탔는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막내 디모데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엘리엇과 남은 가족은 깊은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특히나 엘리엇은 자기의 부주의로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엘리엇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내 종, 나의 욥이다. 너 자신을 정죄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엘리엇은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변함없음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엘리엇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고, 영원한 비전을 향해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회복 불가능한 것 같은 고통은 부활의 믿음으로 치유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깊은 상처를 품고 사는 수많은 사람에게 부활의 주님을 누구보다 분명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만큼, 아는 만큼만 주님을 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대신 더욱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경험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길 원하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받아주십니다.(김상철 목사) ![]() |
초대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⑧ 열 번째, 시간적 요소로 "날, 시간, 그리고 모임의 길이"입니다. 우리가 기울여야 할 또 다른 관심은 초기 교회의 시간적 특성입니다. 날을 정하거나 시간 그리고 모임의 길이를 정할 때 주로 어떤 기준을 적용했을까요? 이에 대한 몇 가지 사례가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주의 첫날 즉 일요일에 모여 서로 떡을 나누며 갖는 모임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함께한 공동체에게 주중의 어떤 한 날을 다른 날보다 신성시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 것을 청합니다. 상황에 따라 아침이든 저녁이든 주 중이든 자유롭게 모였던 것입니다. 교회 모임의 시간적 길이에 대하여는 분명한 사례가 없습니다. 모임을 끝나는 시간이 자유로웠거나, 바울이 가정교회를 방문하여 동이 틀 때까지 밤새도록 토록을 한 경우처럼 길었을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로 헤롯이 베드로를 체포했을 때,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각자의 가정교회에 모여 그의 석방을 위해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모임 시간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은 특정한 필요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정 교회도 시간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과 필요에 의해 자유롭게 모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홉 번째, 사회적 요소로 "가정교회의 크기에 관하여"입니다. 개인적 경험과 사회학적 연구에 의하면 모임의 크기는 회원들 사이의 관계와 그룹의 역동성, 그리고 배움의 과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1세기 가정교회에 있어 모임의 크기에 대한 사회적 요소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전형적인 1세기 가정교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몇 명 정도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 보도록 합시다. 불행히도 성도들의 지역 모임 크기에 대해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또한 사도들의 직접적인 명령도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들은 검토해 볼 만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작은 모임이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의 방식을 따른 가정교회는 아니었지만,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사도들이 세운 믿음 공동체를 위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큰 다락방"이 있는 가정에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이렇게 친밀한 장소는 그들 사이의 강렬한 상호 교감을 위한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발을 씻기고 음식을 나누며, 예수님의 임박한 체포와 죽음에 앞서 성찬에 참여하고, 찬송을 불렀으며, 배반과 부인에 관한 마음 아픈 대화가 오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적인 모임의 크기에 대한 다른 단서는 유월절 직전의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와 120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어느 집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좀 더 깊은 고찰을 위해 베드로가 로마 장교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를 봅시다. 그곳에는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자 큰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큰 무리들이 새롭게 세워진 가정교회로 함께 모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전하는 정보는 충분하진 않지만 다행히 평균 가정의 실제 크기를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1세기의 가정교회는 최대 30명에서 35명의 사람을 충분하게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마 30명 내외의 사람들이 모이면 큰 교회 하나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가정교회는 이보다 작았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모임을 연상시켰을 것입니다. 이러한 규모의 가정교회는 보다 역동적이었으며 가깝고도 친밀한 가정의 분위기로 서로 영향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 |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하소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주 하나님! 저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한없이 감사하고 감격할 뿐이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었더라면 저희가 어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었겠사오리까? 오늘도 저희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 복된 방송으로 이끄셨기에 저희들이 이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됨을 믿습니다.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경배하오니 저희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십자가로 저희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졌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못난 모습, 허물 많은 모습만 보일 것이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신 주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날마다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신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몸으로 느끼며 참회할 수 있게 하시고, 저희가 자랑할 것은 생명의 법 아래 살게 하신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 박에 없음을 뼛속 깊숙이 깨닫고 확신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아직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합니다! 또한 그 십자가만을 붙들고, 그 십자가만을 앞세우며,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십자가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하려는 어리석음이 없게 하시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기쁨과 소망을 삼을 수 있는 저희의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또한 주님의 피 묻은 희생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희 자신을 깨뜨리기에 주저함이 없게 하시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잘 깨뜨리는 삶을 살아감으로 저희를 위해 모든 것을 깨뜨리신 주님을 닮아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구원에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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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 행실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압니다. 당신의 행실의 열매는 어디 있습니까? 당신 자신의 구원의 열매를 보십시오! 당신 속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 속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행실을 보여주십시오! 우리의 구체적인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이 사실에 마음이 찔려 회개할 때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런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왜 회개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죄는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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