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25번째 이야기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계시가 왔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 오직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하고 괴로워할 대가 많습니다. 결국 내가 나를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평온을 되찾을 것입니다. 판단하는 마음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이 부분은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의 열심이 앞선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판단하는 마음을 우리의 신앙의 독이 됩니다! ![]() |
이제 치매가 깊어지셨습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이제 치매가 깊어지셨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막내아들이 가면 알아보시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십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저는 어머니를 찾아뵙고 침대 밑에 앉아 조용히 찬송을 불러드립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찬송가를 이제는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밖에는 기억하지 못하시는 어머니. “병상에 홀로 계신 나의 어머니에게 주님이 친구 되어주시고, 기쁨이 되어주시고, 모든 것 되어주시며, 그의 모든 눈물과 마음의 한을 주의 병에 담아주소서.” 제가 이렇게 기도하면, 어머니는 도리어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며 “우리 아들을 지켜주세요!”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식 걱정을 하시는 어머니. 저를 바라보시면서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왜 기침하는지?’ 걱정스레 물으시는 어머니를 보면, 가슴이 한없이 무너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천국은 마치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는 보석과 진주와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천국이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하루하루 병색이 짙어가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천국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 것들은 그에 비할 때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그 말씀은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집착과 미련으로부터 떠나서 "거룩한 나그네 인생이요, 청지기의 삶"이라는 것과, 나의 소망과 시민권이 천국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김인강 교수) 그렇습니다. 우리가 짓게 되는 모든 죄는 욕심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욕심을 온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갖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욕심껏 살고 천국까지 가겠다는 분들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튼, 욕심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태복음 13장 45, 46절입니다. 욕심을 버립시다! ![]() |
기독교의 핵심 진리⑯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하면 우리는 오로지 순결과 의(義)만을 생각합니다. 물론 "거룩"이라는 개념에는 그러한 덕목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순결과 의가 거룩의 일차적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룩(holy)"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뜻은 "구별됨", 혹은 "다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의 크나큰 차이점에 주목합니다. 즉 하나님의 초월적인 위엄을 말하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를 경배하며 사모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그것과 다릅니다! 성경에서 거룩한 물건이나 거룩한 사람, 혹은 거룩한 시간이라고 할 때는 "구별된, 성별된, 혹은 하나님의 손길에 닿아 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옆 모세가 서 있던 땅이 거룩했던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로 갑자기 평범한 것이 특별하게, 흔한 것이 기이한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룩은 "하나님의 순결하고 의로우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옳은 일만을 하십니다. 그른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품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올바른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의(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와 외적 의(하나님의 행하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위대하시고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어떠한 악도 섞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거룩하라"라는 부르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적 위엄을 나누어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통상적인 우리의 타락한 죄성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과 행동을 반사하는 거울과 향기와 편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 |
![]() |
나의 죄와 허물을 내게 알게 하소서!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욥기 13장 20-38절). 함께 읽은 본문 중 25절, "검불"은 가느다란 마른 나뭇가지, 마른 풀, 낙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또한 27절, "차꼬"는 죄수를 가둘 때 쓰는 것으로,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기구를 가리킵니다. 욥은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치시거나 두렵게 하시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부르시면 자신이 대답할 것이라며, 자신이 말하면 하나님이 대답해 주시길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재적하셔서 자신이 젊을 때 지은 죄를 받게 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러한 호소는 하나님을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내게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소서(20-22절). 욥은 하나님께 변론하러 나서면서 20-21절에서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합니다. 9장 33-34절,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라고 말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이는 정당한 변론을 위해서는 합당한 여건이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손이 멀리 떨어져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격과 장악을 의미합니다(1:11; 2:5; 6:9; 10:7 등). 둘째, 하나님이 위엄으로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위엄과 권능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행하실 수 있어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그때는 22절, 어떤 억압이나 제약 없이 하나님과 욥 사이에 "부름"과 "응답"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우리의 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제를 위한 조건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찌하여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23-28절). 욥이 하나님께 말하는 방식은 "탄식"입니다. 욥은 다양한 질문과 요청으로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쏟아 놓습니다. 욥은 먼저 23절, 자신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항변하는 것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만큼 큰 죄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죄가 있다면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욥은 24절,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시고 자신을 "원수"로 여기시는 이유를 묻습니다. "원수(히, 오예브)"는 욥 이름의 어원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비춰 주실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그분 얼굴을 숨기지 마실 것을 애원합니다. 하나님 얼굴을 드러내심이 은혜요, 가리심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시편 30:7). 죄를 쏘아보시는 하나님 얼굴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택하신 백성에게 하나님 얼굴은 어둠 가운데 빛이요 은혜입니다. 욥은 25절에서 자신을 "낙엽"과 "마름 검불"에 비유합니다. 그만큼 약하고 비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욥은 인간 실존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와 긍휼을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어찌하여, 어찌하여..!라고 부르짖는 욥의 절규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다 듣고 계셨던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여전히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역시 부르짖기를 그치지 않으며 죄를 토설합니다. 원수가 아닌 친구로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서 주님의 낯을 돌리지 마시고,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
관계의 열쇠, 친밀함..!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습니다. 조금 전에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아이가, 금세 얼마 무릎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털썩 앉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자기가 말을 안 듣고 잘못해서 야단을 맞았어도 엄마 아빠는 틀림없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아이가 항상 엄마 아빠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를 정말 친밀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가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가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엄마라도 사정이 있어 오래 떨어져 지내면 아이가 어색해합니다. 엄마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기는 해도 덥석 안기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열쇠는 단순히 그분을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분과의 "친밀함"에 있습니다. 친밀함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멀게 느껴져 주님께 내 삶의 무게를 맡기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넘어져 아플 때 주님께 가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절망 중에도 믿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완전한 용서와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신뢰합니까? 예수님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다시 오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초부터 잘 다져나가야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할 수 있을까요?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기본적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바르고 옳은 길입니다! ![]() |
초기 교회의 지도력은 어떠했을까?① 올해 초 교회 개척을 시작한 저로서는 매우 궁금했던 점이 초기 교회의 지도력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원동력으로 교회를 섬기며 이끌어갔을까요? 신약성경은 인간 지도자에게 맡겨진 분명한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교회 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해 초기 교회는 지역 지도자와 순회 지도자라는 두 가지 형태를 주로 활용했습니다. 먼저 지역 지도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적 순회 사역자들은 지역 현지인들 중에 지도자들을 세워 지역 교회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가정교회에도 매우 중신적인 원칙이 됩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지역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장로, 감독, 목자"를 사용합니다. 지역 지도자에 대한 이러한 용어들은 통일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교차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용어들 사이의 구분은 성경에 나타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형성된 지도자들 사이의 위계구조로 인한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장로이자 감독이며 목자였던 것입니다. 이 용어들은 한 인물의 서로 다른 역할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역 가정교회의 주요 지도자들은 주로 "연장자"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의 역할을 지역적이고 지속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된 영적 양육자였고 교사와 지역 성도 공동체의 지도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아프면 기도해 주기 위해 장로를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해석에 대한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그들이 참여했습니다. 교회의 전략적 방향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그 과정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때때로 지역 지도자들은 "집사"라고 불렸는데, 이는 "종"이나 "사역자"라는 의미입니다. 집사들은 장로들의 교회 일처리를 도왔으며, 특히 재정이나 물질적인 필요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들은 부모가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명령적인 태도가 아닌, 겸손과 사랑을 지닌 태도와 열심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들에게 "순종" 하며 "복종" 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도자들에게 무분별하게 맹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려움이 있을 때 지도자들과 함께 스스로 헤쳐나가라는 의미입니다. 장로들과 집사들은 모든 성도가 참여하여 다양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바울은 각 교회와 도시에 장로를 세우는 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장로들이 정확히 어떻게 분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는데, 여기서 언급한 "교회"가 단독의 가정교회를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도시 단위의 교회 또는 지역 단위의 교회를 지칭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증거에 따르면 최기 기독교 가정교회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이 되었던 1세기 유대 회당 시스템에서는 한 팀의 장로들이 각 지역 회당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다. 성경의 기록도 이와 비슷하게 한 개인보다는 다수의 장로들이 팀을 이루어 기독교 공동체를 감독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단독의 지도자보다는 협력과 단결이 요구됩니다. 다라서 장로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면 각 가정교회는 장로들로 구성된 소모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가정교회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좀 더 큰 지역 단위 팀의 일원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장로 한두 명을 "선임" 장로나 "지도" 장로, 혹은 "관할" 장로 등의 이름으로 다른 장로들 위에 놓는 피라미드식 체계는 초기 교회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반면 집사들은 필요에 따라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에베소와 빌립보에 있는 장로와 집사들에 대해 바울과 디모데가 토론한 내용에서 암시되어 있습니다.(계속..) ![]() |
부활의 믿음을 갖고 살게 하소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저희에게 부활의 소망으로 함께해 주시는 주님!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심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소망과 영원한 삶을 갖게 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활주일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그 부활 또한 저희를 위해서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믿습니다. 이 시간 저희 모두가 다시 한번 소망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 저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지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제는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부활의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는 담대함이 있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부활하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사명에 전심전력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음과 공포와 절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특별히 어려움과 질병의 고통에 처한 형제자매들을 기억하시옵소서. 여러 가지 문제로 삶이 고달픈 그들을 기억하셔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믿음이 흔들리는 교우를 기억하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꼭 붙잡고 새 힘을 얻어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병마로 고통당하는 교우를 기억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병마를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얻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만물이 새 생명을 과실로 잉태하는 계절입니다. 새 생명을 얻는 저희 모두가 생동감과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복을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
맨송맨송한 사람이 되었다! 이 얼마나 애통하고 원통한 일입니까? 교인들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도 없이 교회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단어를 들어도 맨송맨송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살을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점을 떼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듯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않고, 그저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습니까?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예림의집 메일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림의집 2427번째 이야기 (0) | 2021.10.29 |
---|---|
예림의집 2426번째 이야기 (0) | 2021.10.28 |
예림의집 2424번째 이야기 (0) | 2021.10.26 |
예림의집 2423번째 이야기 (0) | 2021.10.25 |
예림의집 2422번째 이야기 (0) | 2021.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