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22번째 이야기
마음에 생채기가 난 사람은.. 마음에 생채기가 난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계속 마음에 품게 됩니다. 악한 영은 대부분 분노와 미움으로 그 상처를 확대시킵니다. 판단은 분노와 미움을 촉발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의와 불의, 그리고 지혜와 무지를 분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별과 판단은 다른 것입니다. 분별은 영적인 지혜에서 오는 것인 반면, 판단은 분노의 영과 미움의 영을 불러옵니다. 분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는 것이지만, 판단은 나의 의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할 것이 아닌, 상황을 분별해야 합니다! ![]() |
우리가 왜 사는지 아세요?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습니다. 담임선생님은 걱정이 되셨는지, 지나칠 때마다 농담처럼 말을 걸고는 하셨습니다. “내 정신연령이나 네 정신연령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구나. 인강아, 그래도 밝게 살아야 되지 않겠니?”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는지, 담임선생님께서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오셨습니다. 그분은 저를 조용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길게 하셨습니다. 제가 겪은 감정이 아마도 단순한 사춘기의 방황이나 장애에서 오는 좌절감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위한 것이었지만, 지루한 훈계가 계속되었습니다. 교실 바닥에 무기력한 오후의 햇빛과 침묵이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아세요?” “…” 그분은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모른다면, 그럼 제 앞에 계신 분은 왜 사셔요?” 중학생의 당돌한 질문에 상담사 선생님은 당황해했습니다. “그건 … 나도 몰라!” 우리의 대화는 거기에서 중단되었습니다. 그분은 담임선생님께 "자신의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학생이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분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만, 그 당시 제가 고민하던 문제를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저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집에서 언덕 위로 보이는 곳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 교회에 갔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신앙과 하나님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던 저는 전도사님께 매일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이런 질문을 하는 저를, 전도사님은 버거워하셨습니다. 중간에 다니다가 그만두었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던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 고민들은 훗날 열매를 맺었습니다.(김인강 교수) 그렇습니다. 저도 꽤나 일찍부터 건방지게 굴었지만, 어린 김인강도 참으로 당돌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겪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냥 질문으로 끝나지 않고, 그 답을 찾기 위하여 노력할 수 있도록, 먼저 태어나 경험하신 분(先生)들이 잘 이끌어줘야 합니다. 저는 그리 오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지만, 그만큼의 삶의 지혜를 나누기 위해 방송도 하고, 편지도 보내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제가 얻은 삶의 지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 |
기독교의 핵심 진리⑬ 하나님의 전능하심 신학자라면 누구나 학생들로부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기 마련입니다. 저도 신학생 시절에 교수님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질문들 중에는 단순한 질문부터 심오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진부하고 사악한 질문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들어 옮길 수 없을 만큼 큰 바위를 만드실 수 있나요?" 이 질문은 언뜻 보기에 신학자들을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잡아매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이 바위를 옮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바위 하나도 만들지 못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셈입니다. 이런 질문은 심술궂은 학생들이 교수님을 놀리기 위해 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그릇된 이유는 전제가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w)"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신학 용어로서의 전능이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 몇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히브리서 6:18).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창조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시간, 같은 관점 안에서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심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 대한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의 어느 한 부분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위의 딜레마에 관한 올바른 답이 있습니다.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그런 바위를 만드실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자신의 힘을 능가하는 뭔가를 만드신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하심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멈추실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전능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7)라고 말씀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상기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피조물의 능력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은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유한한 것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에 제한받습니다. 하나님께는 죄가 불가능합니다. 그 누구도 죄짓고 싶어 하는 마음 없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짓고 싶어 하실 수 없기에 죄를 범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엄청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나타내신 능력을 우리의 구원에도 나타내셨음을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실 때도,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실 때도 그의 능력을 펼치셨습니다. 우리는 피조계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능력과 권세가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전능하십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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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마 사람 소발의 대답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욥기 11장 1-11절). 함께 읽은 본문은 나아마 사람 소발의 책망입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말이 너무 많다고 질책합니다. 또한 욥이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깨끗하다 한다고 지적합니다. 소발은 하나님이 지혜의 오묘함과 지식의 광대함으로 죄를 잊게 해 주셨음을 알라고 욥에게 권고합니다. 높고 깊고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누구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말의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가 무한한 창조주 하나님을 완전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적이 아님 위로와 격려요,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말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겠는가?(1-4절). 고난 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때는 그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아마 사람 소발은 다른 친구들처럼 욥을 공격하며 발언을 시작합니다. 그는 욥이 말 많은 사람이라고 비판합니다. 2절,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니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9장 15절과 20-21절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욥의 주장을 언급하며 3절, 이를 자랑하는 말과 비웃는 말로 이해합니다. 한 가지 문제는 소발이 욥의 이 모든 발언들을 4절, 하나의 "도(道)"로 규정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도(히브리어, 레카흐)"는 진리로 수용할 수 있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소발은 욥의 탄식을 고난 당하는 자의 실존으로 듣지 않고 "교리적 진술" 정도로 이해하고 평가합니다. 4절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분이시니다. 소발은 욥이 스스로 정결하다 말하고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알지 못한다며 그에게 모욕과 조롱을 퍼붓습니다. 소발은 욥의 말을 곡해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남의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전능자의 완전함을 찾을 수 있는가(5-11절). 하나님은 인간의 탐구 영역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소발은 욥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지혜의 오묘함"을 말합니다. 그는 5-6절, 하나님이 욥에게 지혜의 오묘함을 깨닫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소발 자신도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온전히 알지 못한 채, 욥을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신비하심으로 아는 성도는 언제나 겸손하고 신중합니다. 형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판단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소발은 그러면서 하나님이 욥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 처벌하지 않으시고 욥이 지은 죄보다 훨씬 가볍게 처벌하신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소발은 7-9절, 하나님의 오묘하심이 높이, 깊이, 길이, 넓이 면에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고 합니다. 또한 소발도 욥처럼 하나님을 제한할 수 없는 분으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욥은 감히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불가해한 하나님을 묘사한 반면, 소발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불가해한 행동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심 앞에 우리가 취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오묘하시고, 신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환난 중에 탄식하는 욥의 말을 반박하며 그를 더 큰 고통에 빠뜨린 소발을 반면교사로 삼기를 원합니다. 고난 당한 사람이 힘들어서 터뜨리는 푸념을 듣고, 하나님을 변호하겠다는 자기 의에 빠져 경솔히 나서지 않게 하시옵소서. 칼 같은 말로 남을 공격하지 않도록 우리의 혀를 제어해 주시옵소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는 참으로 교만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오로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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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아는 인생 우리 인생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몰랐을 때, 구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이미 의로움을 우리 운명으로 정해 놓으시고 "자, 지금부터 살아 보자!" 하고 시작할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운명을 가지고 아담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죄인의 자리에서부터 삶을 시작합니다. 너무 일찍 정답에 이르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밟아나가면 더욱 좋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하나님의 목적의 깊이와 무게를 뼈저리게 아는 자리까지 가십시오. 인생을, 기독교를, 십자가의 참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를 다 알면서도 보는 사극의 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역사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사극의 재미입니다. 결과를 다 아는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그때 어떻게 해야 했는지 보입니다. "결국 너희가 이길 거니까 거기서 너무 겁내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멋있게 굴어. 괜찮아. 네가 이겨!" 하고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때 멋있게 행동했을 텐데 말입니다. 사극 드라마를 보는 우리의 시각은 전지적 시점이기 때문에 더욱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게 그런 것입니다. 사극처럼 번복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결과를 이미 아는 상태에서 오늘을 살아 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의 손안에 이루어진,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의 운명을 확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놀라움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야말로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도하심에 따르면 될 것입니다.(박영선 목사) ![]() |
초대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⑥ 일곱째, 관계적 요소, "서로" 그리고 "각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세상이 진정으로 그분의 제자들로 인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고, 공동생활을 이루며 서로의 삶을 통한 나눔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기 교회는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수십 차례 "서로", "각자"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실제적인 사랑을 표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각자의 역할의 충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모임에 있어서 전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가정교회가 모일 때는 분명히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관계적 힘이 느껴졌을 것이며, 주의 깊은 방문자라면 즉시로 그러한 특징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그리고 "각자"라는 구절은 "상호 환대, 조언, 일치, 세움, 긍휼, 관심, 고백, 헌신, 격려, 사귐, 용서, 문안, 화합, 존경, 동정, 교훈, 친절, 사랑, 화평, 기도, 섬김, 복종, 그리고 인내"와 같은 부분들에 폭넓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서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교훈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속임, 질투, 불평, 판단, 성냄, 그리고 비방"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단지 이론적인 토론의 대상이나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일상에서 서로에게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되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도들이 계속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잘 알았습니다. 신약의 가정교회는 툭 성상 소규모 사람들의 친밀한 모임이었고 따라서 갈등하고 분리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도들은 서로의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깊은 우정은 오로지 그러한 친밀한 모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가정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여덟째, 복음 증거의 요소, "비 그리스도인들이 방문할 때"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부분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일반적으로 공공장소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만 가정교회 형태로 모였던 것과는 구분되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을 가진 친구들이나 이웃이 방문한다면 가정교회에서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한 것을 보면, 방문자가 왔을 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에게 쉬운 말로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자제하도록 권했는데 이는 메시지를 해석하는 사람이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삶을 맡기도록 하는 데는 예언이 더욱 의미 있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언급을 보면 가정교회 내에서도 때때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긴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방문자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회심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은 모두에게 깊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의 모임은 아니지만 다른 비슷한 예로 사도 베드로가 로마 장교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고넬료는 사도들의 방문에 맞추어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베드로가 메시지를 다 전하기도 전에, 성령님께서 그곳에 모인 자들에게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정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신생 가정교회의 요청으로 베드로는 며칠을 더 머무르며 그들이 다음에 할 일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고넬료와 절친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났으므로, 그들은 가정교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관계가 가까운 사람들을 또 초대했을 것입니다! ![]() |
사명을 좇아갈 수 있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저희들의 삶을 복되게 하여 주셔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고 슬픔과 고통이 만연되어 있사오나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침 이슬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연약한 저희들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을 얻어서 독수리처럼 영원을 지향하게 하시고 강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자비하신 주님! 만물이 무르익은 가을의 한복판 서서히 찬 기운이 온 대지를 덮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자연 만물은 가을의 계절에 맞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도 주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기를 봅니다. 혹 헛된 것에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희생하기를 원했던 성경 속의 믿음의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처럼 저희도 힘을 다하여 사명을 좇아갈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을 충성이라"(고린도전서 4:2)라고 하셨사오니 끝가지 주님께 충성하며 기쁨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최대의 행복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그분이 주시는 상을 맛보는 것임을 믿습니다. 사명을 따라 죽도록 충성하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어우러진 방송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적 무장을 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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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예수 혼자 죽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의 자아가 버젓이 살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다"라고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매일매일 그 정과 욕심으로 이글거리는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세상을 사랑하는 정욕의 자아가 십자가에 죽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녔어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입만으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고 행동으로 그 믿음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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