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2418번째 이야기
우리 삶의 모습들이 비춰질 때.. 하나님의 거룩한 빛 가운데 우리 삶의 모습들이 비춰질 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끊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와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방송을 함께하면서 결단합니다. 죄를, 세상을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지.. ![]()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자신의 얼굴과 신체조건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성격이나 재능은 어떻습니까? 흔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정작 많은 부분은 우리가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시작부터 그렇습니다. 인종, 국적, 성별, 부모형제, 가정환경, 재능, 성격, 외모와 건강 등. 만일 우리가 이러한 조건을 골라서 태어날 수 있었다면, 과연 지금의 조건을 선택했을까요? 이렇듯, 삶은 그 시작부터가 아주 불공평합니다. 누구는 태어나 보니 아이큐가 천재 수준이고, 누구는 자라면서 보니 ‘경계선 지능’입니다. 누구는 부모의 사랑이 쏟아지고, 누구는 아무도 반겨주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문제는 자신의 조건에 불만족할수록 다른 사람의 조건이 좋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억울하고 괴롭습니다. 차라리 내가 선택한 거라면 군소리 없이 받아들일 텐데 말입니다. 이런 불만은 흔히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일이 안 풀릴수록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면서 따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라고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자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조건 대부분은, 사실 부모도 역시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부모 또한 타고난 조건을 더 낫게 만들어보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을 겁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은 돌고 돌아 고스란히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불공평함에도 공평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누구도 조건을 선택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은 어느 누구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삶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불공평한 공평함’ 앞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 속에서 살아가느냐,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 그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문요한) 그렇습니다. 목사가 팔자타령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자신의 팔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팔자를 고쳐볼 생각은 없는지요? 거듭나면 됩니다. 육이 아닌 영으로 거듭날 경우, 타고난 조건과는 상관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보다 두 배 반이나 재능을 적게 받았지만, 결과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동일한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33). ![]() |
기독교의 핵심 진리⑨ 성경의 사적 해석 성경의 사적 해석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 각 개인이 "성령님의 조명" 아래에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남긴 위대한 유산 두 가지는 성경의 사적 해석 원리와 성경을 일반적인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루터는 이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며 지신을 이단으로 몰았던 종교 회의인 "보름스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말씀과 상식에 비추어 정죄 받지 않는다면 -나는 교황과 종교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행위는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이 선언, 그리고 잇따른 성경 번역은 두 가지 기여를 했습니다. 첫째는 로마 교회가 독점하고 있던 성경 해석의 권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전통과 교회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로 받아들이게 하는 교리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성경 해석이 일반인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가 보다 논란과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가톨릭교회가 우려하는 바,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성경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관주의는 성경의 사적 해석에 크나큰 위험 요소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사적 해석의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해석의 "권리"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할 "의무"가 수반됩니다. 신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진리로 꾸며낼 자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경 해석의 건전한 원리를 이해하고 주관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다고 해서 성경을 냉랭하고, 추상적이고, 생명력 없는 것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삶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말씀이 무어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특정 말씀에 수많은 개인적 적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올바른 의미는 한 가지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권리에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할 의무가 뒤따릅니다. 즉 성경은 해석자의 견해에 맞추어 연마되거나 모양을 갖추는 "고무 찰흙"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견이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 아래 거해야 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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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욥기 9장 11-24절). 함께 읽은 본문에서 욥은 대항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진노를 돌이킬 자는 아무도 없기 대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대답할 수 없고, 심판자에게 간구할 뿐이라 말하며, 까닭 없이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따라 온전한 자도, 악한 자도 함께 멸망시키신다고 말합니다. 욥이 말하는 구약의 하나님은 너무나 두려운 주권자이자 주권자 하나님의 한 면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대적 행동(11-16절). 능력의 하나님께는 누구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욥은 자신의 계시 경험을 말합니다. 엘리바스는 4장 15절에서 "앞으로 지나가심"을 통해 계시를 경험했지만, 욥은 11절 그분의 "지나가심"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욥은 12-13절,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구도 그분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감히 하나님께 대답(대응)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분의 저항할 수 없는 힘 때문입니다. 욥은 단지 심판하시는 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회개를 전제로 구하는 은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이 없어도 힘을 가진 재판장에게 구하는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의 적대적 행동을 계속 경험합니다.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인간의 불의함에 대해 수긍할 분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의 준엄한 심판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은총을 비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고서도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행동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상처를 깊게 하시는 하나님(17-24절). 욥은 하나님의 적대적 행동을 직설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폭풍으로 치시고 까닭 없이 상처를 입히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2장 3절의 사탄이 충동해 까닭 없이 욥을 치게 했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욥의 고난은 1장 1절과 8절에 비추어도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는 18절, 숨 돌릴 틈도 없이 괴로움을 당했으며 19-20절, 하나님의 위력에 눌려 자신의 의로움을 제대로 입증할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21절 자신의 온전함(순전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간절함이 보입니다. 그는 22절 심판에는 온전한 자와 악한 자의 구별이 없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그의 머리에서 내려와 가슴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얻은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자와 악한 자를 구별하십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자신의 처지에 매몰된 나머지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나아가 욥은 24절에서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라고 울부짖습니다. 이렇듯 계속되는 욥의 탄식과 질문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예고 없이 우리를 폭풍 한가운데로 몰아넣으시고 까닭 없이 아프게 하시는 것 같을 때, 단편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자녀의 작은 심음에도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시옵소서. 갈 길을 모르는 저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채워주시고, 성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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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위로는 상처만.. 상담을 전공한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그는 아들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다며 와서 기도해 달라는 교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들은 이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상담 전문가인 그는 얼마든지 부모를 심리적으로 위로할 수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모와 같이 울었습니다. 5년 후에 아이의 부모가 그 목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죽었을 때 목사님이 해 주신 일을 저희는 두고두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그 위로에 저희 가족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자신은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고 하자,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설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은 옆에서 울어 주심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라고 거푸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여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욥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식 열 명을 졸지에 잃은 아버지, 온몸에 피부병이 나서 괴로워하는 남자, 아내는 그를 저주하고 떠나버린 버림받은 불쌍한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재산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사업가에게 이런 말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지식의 말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마음을 함께 나누고 울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큰 고통에 빠진 이에게 당장에 그 이유를 알려 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시지 않을 수도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 고통을 딛고 일어나 회복하기를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웃이 겪는 슬픔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진정한 위로자가 됩시다!(강정훈 목사) ![]() |
구원받은 믿음을 회복하게 하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을 속된 세상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셔서 신령한 말씀의 꼴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항상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며 사는 복 있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 불의하고 속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긴 했지만, 주님의 백성 답지 못한 삶의 흔적들이 저희에게 너무도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깨닫는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주님께 솔직히 고백하며 회개하게 하시옵소서! 용서로 저희를 품어 주시는 누님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구원의 주님! 이 시간에 저희들이 과연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지 돌이켜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지 저희 자신의 믿음을 한 번쯤 되돌아볼 수 있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분명히 누가복음 13장 24절에서 성경에 구원을 어려운 것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말씀하셨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구원받는 것을 쉬운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게 하시고, 구원받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하시옵소서. 지금 저희의 믿음이 느슨해져 있었다면 이대로는 거짓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다시금 믿음을 굳게 세우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사도바울도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였사오니, 저희의 믿음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올인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또한 주님이 맡겨주신 것은 온 힘을 다하여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가진 것 모두를 깨뜨려서 헌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초대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② 둘째, 신비적인 요소로, "기도, 찬송과 노래"입니다. 이 기도와 찬송가 노래를 신비적인 요소라고 할까요? 바로 아무나 할 수 없고, 따라는 할 수는 있어도 진실되게 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진정한 기도, 찬송과 노래를 부를 부 있습니다. 기도, 찬송과 노래는 1세기 교회 모임에서 강조된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뭔가를 간구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대화이고, 찬송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이며, 노래는 그런 기도와 찬송을 음악에 맞추어 멜로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적 노래와는 다른 것입니다. 기도는 신약 시대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가장 일반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신자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했고, 사도들과 권세 있는 자들과 병자들, 그리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할 때, 분명한 결정을 내려 할 때, 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유들로 인해 기도했습니다. 성경에는 직접적인 기도문이 기록된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약 90번이나 언급된 기도에 비할 때, 찬송(약 40번)이나 노래(약 12번)는 몇 번 짧게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기도보다 그 빈도수가 적습니다. 따라서 초기 가정교회 모임에서 찬송과 노래보다는 기도가 비교적 강조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현제 가정교회가 찬송과 노래를 제쳐놓고 기도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였을 때 모든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기도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몇몇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은 그런 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개방적이고 높은 참여의식은 큰 모임에서 조성되기는 힘들지만, 크기가 작고 친밀한 초기 가정교회의 규모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교회도 기도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셋째, 지적인 요소들로,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초기 교회의 모임은 또한 신자들의 지적인 성장을 위한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지적 성장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구하던 사람들을 특별히 주목했습니다. 바울의 서신 전체에는 이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바울과 그가 세운 공동체의 이러한 경향은 지적 활동에 대한 많은 언급을 통해 분명히 관찰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용어와 개념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고려하다, 확신시키다. 분별하다, 파악하다, 알다, 지식, 배우다, 의미하다, 유의하다, 설득하다, 합리적인, 일깨우다, 가르치다, 시험하다, 생각하다, 사고, 진리, 이해, 지혜 같은 용어들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는 이런 것들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나타났을까요? 가르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배우는 것과 함께 서로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은 지식이 풍부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탁월한 "선생들"이 서로의 유익을 위해 재능을 사용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가르침의 재능을 은사로 주신 사람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는 지역 장로들이나 성도들, 혹은 여러 교회를 순회하는 사드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요한은 거짓 교사들이 점차 교회에 침투해 들어올 가능성과 함께 그들로 인해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붙들지 못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배우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기분이나 생각에 기초하지 않고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나 글로 쓰인 가르침과 성경에 기초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모인 자리에서 신자들 사이의 상호 가르침의 방식으로 적용되었습니다.(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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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담치기 하려고 하는가? 교회에서 들은 수많은 위로의 말들, 성경에 나열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에게 해당이 없음을 분명히 아십시오!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도끼만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까 회개는 적당히 넘어가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맺지 않고 있으면서 어디 감히 천국을 담치기 하려고 합니까? 담치기 할 꿈도 꾸지 마십시오! 당신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그 무거운 죄를 해결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 |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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