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메일 모음

예림의집 2415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21. 10. 13. 13:09

예림의집 2415번째 이야기

사색의 바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저는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고 그저 그곳에 가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시는 일을 보고 오면 됩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시고 그냥 떠나세요! 우리가 익숙한 것을 끊어버릴 때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 선교의 시작입니다." 선교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준비만 하면 됩니다. 무언가를 퍼부어주고 간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부족한 자신들을 사용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선교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선교지인 것입니다!

 

예림가족 이야기

조금 부족해도 마음이 같으면..

체중조절에 성공한 사람의 700%는 2년 이내에 원래 체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식욕이란, 음식 대신에 위로와 관계가 필요하다는 신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배고픔과 공허함은 먹는 걸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가까운 이웃은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들일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웃으로 주신 그들을 경쟁상대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직장이나 학교가 가정 같아야 하는데,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입지 전쟁, 생존 경쟁에 숨이 막혀 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단점, 그리고 실수가 나의 성공과 이익의 발판이 되는, 슬픈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서로를 가족처럼 섬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옆 사람이 며칠 밤을 새워서 일해도 나와 상관없으면 그냥 가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옆 사람이 바쁘면 그를 도와서 가능한 한 그가 밤을 새우지 않고 늦게라도 집에 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한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은 "남을 돕기 위하여 존재한다."라는 핵심가치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회사에서는 아무리 실력자라도 이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채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 면접은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가 이 가치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아주 심층적인 인터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마음이 같으면 일을 가르쳐서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능력보다는 서로를 돕고 나눌 수 있는 성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일단 우리 가족이 되면 진짜 가족처럼 돕고 보살핍니다. 지상 천국인 교회 공동체도 이러한 정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하형록)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진정 "이상적(理想的)인 회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이런 회사를 다니고 싶어 하겠지만, 실제로는 실현 가능성이 적은 회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형록님이 대표로 있는 <팀하우스>에서는 이런 일이 이뤄지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팀하우스>가 이런 모습의 회사로 발전하게 된 기본적인 정신 바탕이 ‘잠언 31장’이라는 겁니다. 꼭 한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빌립보서 2장 2절의 말씀도 마음에 담아두세요!

 

단장 칼럼

기독교의 핵심 진리⑥ 하나님의 선지자들


구약의 선지자들은 독특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아 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선지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았으므로 그들의 말은 곧 하나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로 메시지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개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예배와 순종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예배와 순종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예배 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본래의 예배 형식을 정죄하거나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은 혁명가도 아니었고 종교적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의 예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사회적 공의와 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이스라엘의 양심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대언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권위로 두려움 없이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이 부르심과 성령의 능력이 선지자의 자격 요건이었습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끊임없는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아닌 자신의 몽상과 의견을 따라, 사람들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했습니다. 그럴수록 참선지자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선포함으로써 심하게 박해받고 거부당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서는 "소선지서"와 "대선지서"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중요도가 절대 아닌 정경으로 인정된 글의 분량에 따른 것입니다. 그 편차는 상당히 큽니다.
신약성경의 사도들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과 선지자들 모두 교회의 기초라 불립니다. 오늘날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언택트 시대가 된 후 인터넷 매체를 통해, SNS를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①주님의 몸 된 교회를 비판, 거부하며, ②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③화합과 격려와 위로보단 정죄에 몰두하고, ④성경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을 가지고 설파하며 ⑤자신이 성경을 통달했다고 자랑합니다.

 

새찬송가 부르기

 

오늘의 Q.T.

한낱 바람에 불과한 인생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기 7장 1-10절).

함께 읽은 본문 중 9절의 "스올"은 무덤, 땅 밑 세계, 형벌과 고난의 장소, 죽음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며 성경에서 대부분 "음부"로 번역합니다. 본문에 욥의 탄식은 그 깊이를 더해갑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품꾼이 삯을 기다리면서 힘든 노동을 참아 내는 것처럼, 욥은 인내하며 여러 달째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자신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빨라 희망 없는 시간이 되어 흐른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에 불과함을 생각해달라고 간구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되었다고 호소합니다.

품꾼의 날과 같은 인생(1-6절).
희망이 사라질 때 삶도 끝이 납니다. 욥은 인간 실상에 대해 탄식합니다. 그의 탄식은 일반적인 사람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 갑니다. 그는 인생을 "힘든 노동, 품꾼의 날"로 비유합니다. 이때 인간은 1-2절, 종이나 품꾼으로 묘사됩니다. 종과 품꾼이 바라는 것은 저녁의 휴식과 그날의 품삯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소박한 바람도 누리지 못합니다. 안식해야 할 밤이 오히려 고통과 번민의 밤이 되었습니다. 4절, 욥의 절규는 믿음 없는 절망과 원망의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지금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절규는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대답에 어설피 타협하지 않고, 극심한 고통을 날것 그대로 버텨 내면서 하나님께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믿음의 외침입니다. 비록 5절, 질병으로 그의 살은 딱지로 뒤덮였고, 그의 피부는 아물었다가 다시 곪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 속에서 6절, 그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갑니다. 욥은 의미 없고 희망 없는 자신의 삶을 토로합니다. 오늘날 욥의 상황과는 반대로 의미와 희망이 가득 찬 삶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낱 바람과 같은 생명(7-10절).
친구를 향하던 욥의 발언이 이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바뀝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 처음으로 외친 말은 "기억하소서"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7절, "생각하옵소서"로 옮겼지만, 히브리어 "자카르"의 의미는 "기억하다"입니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바람일 뿐임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바람은 인생의 무상함을 의미합니다. 욥은 자신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곧 누구도 보지 못하게 될 존재임을 밝힙니다. 그는 한 번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땅으로 가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우회적 묘사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강력한 요청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그러한 종말을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을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치열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상에서 마태복음 27장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던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간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표현하기조차 힘겨운 아픔으로 유난히 긴 밤을 지날 때 그 어둠을 함께 지새우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시옵소서. 괴로움에 잠겨 기도의 끈을 놓지 않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을 묵묵히 기다리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안으시는 주님의 품에서 평안한 쉼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함과 외로움과 고단함을 하나님께 아뢸 때 우리의 간구를 외면치 마시고 들어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

 

그리스도인의 삶

중요한 결정하기..!


하나님은 각 사람을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결정에 관심을 갖고 관여하십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할까요? 주님은 진심으로 우리 생활에 모든 순간마다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거나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으려고 하실 때가 없습니다. 시편 16편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시편 32편 8절,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보이고 우리를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란 책에서 저자인 빌리 그레이엄은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행렬 위에 "헬리콥터식 시각"을 가지고 계신다고 연상시킵니다. 행진할 때 우리는 오직 그 행렬만 보게 되지만, 하나님은 행렬의 앞부분, 중간 부분, 뒷부분을 다 보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길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에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매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늘 선택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합니까? 우리는 방향을 찾는 조종사로서 그분이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을 즐거워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생각으로 순종하는 것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먼저 당신의 안내자 없이 나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당신의 안내자인 성령님과 함께 먼저 점검하지 않고 진행을 합니까? 중요한 결정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십시오!

 

기도의 횃불

참된 예배가 회복되게 하소서!


언제나 저희가 드리는 예배를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 새벽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일상의 하루 종일이 예배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방송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기쁘게 받아주실 예배로 올려드립니다. 저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 갈수록 예배가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음이 보여집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일에 너무나 썰렁하게 반응하는 우리들을 예배의 자리로 다시 불러 주시옵소서!
예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며, 은혜로 풍성했던 그 감격의 자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시옵소서. 더 나은 제사를 드리기를 힘썼던 아벨의 믿음보다, 때우기식으로 제사를 드렸던 가인의 악함이, 이 시대의 신앙인들의 예배 태도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강한 영적인 부담을 느끼며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무엇보다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희 모두가 무너져가고 있는 예배를 회복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저희 삶의 흥망성쇠가 예배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하셔서 예배에 뜨거운 불을 지필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예배를 사모할 수 있게 하시고,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게 하셔서 어떤 예배든지 주님이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참된 예배를 세워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바쁠수록 더욱더 예배를 찾을 수 있게 하시고, 힘들수록 더욱더 예배를 사모하게 하셔서 항상 예배에 대한 승리를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참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정교회를 말하다

초기 성도들은 어디에서 모였을까?②

이처럼 성전 뜰이나 회당 같은 공공장소는 복음 증거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되었으나, 교회 집회를 위해 집에서 갖는 모임과는 대척점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공공장소에서의 모임은 엄밀하게 교회 모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전이나 회당 같은 종교 건물에 대한 애착은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전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만이 공유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신성한 종교 건물의 역할은 종식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 21-24절에서 예언하신 바이며 순교자 스데반도 선포했던 내용입니다.
이제 이 특별하고도 살아있는 신앙은 더 이상 종교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인 공동체, 특별히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가정 및 공동체에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 모임의 환경적 요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들은 가정에 모였으며, 가정에 모여야만 했을까요? 주로 가정에서 모인 이러한 초기 교회의 형태는 특별한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는 다양한 사회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명 수행 방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자연스러운 질문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몰아쳤던 박해와 가난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어쩌면 초기의 제자들은 이 가정교회 형태가 교회의 성장 가정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질 일시적인 한 단계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와 재정이 있다면, 그들 역시 특별한 교회 건물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이런 것들이 가정 교회 운동을 시작하게 된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쉽게 말해서 개척 초기부터 건물을 소유하기 어려우니 일시적으로 가정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다룰 만합니다. 첫째, 1세기 교회가 조직적이고도 심각한 박해를 끊임없이 받았으므로 즉,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비밀리에 가정에서 모여야 했다는 생각은 매우 그럴듯하긴 해도 정확하지 않은 추론입니다.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인정받는 역사 연구에 따르면, 그 시기에 발생한 조직적이고 심각한 박해는 대개는 산발적이고 국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네 차례 있긴 했습니다. 주후 35년 경 스데반의 순교 후 다소의 바울이 주도로 집집마다 다니며 그리스도인을 수색했던 예루살렘 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49년에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대대적으로 추방한 사건입니다. 또한, 주후 64년에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의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후 90년대 중반에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박해 외에 신약성경에 기술된 대부분의 박해는 교회 전반에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흥분한 폭도들에 의해 한 지역에 국한해 발생했으며, 대부분 특정 개인(즉 베드로, 요한, 스데반, 바울 등)에게 가해진 사건입니다.
그 외 다른 시기에는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둘째, 신자들이 가정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흔히 가난이 거론됩니다. 조직적인 박해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비슷한 가난 요인도 정확하지 않은 추론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같이 물질적 도움이 필요했던 교회와 개인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위치와 권세와 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축복의 노래

복음 쪽지~㉾

죄의 문제..!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옛사람과 죄의 몸이라는 실체, 죄악의 뿌리와 밑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면 죄의 문제는 계속 발생합니다. "나는 형법상 죄를 짓지 않았다! 내가 무슨 죄인이냐?" 하지만 틀렸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유혹을 이기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 자아의 문제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보혈로 해결할 때, 유혹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의 죄와 옛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예림의집”이란?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28장 29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후원 모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주님이 주신 권능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사도행전 2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의 성취를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전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을 섬기고 거기서 그분과 즐거워하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제 마음에 모셨던 그날 저녁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 제가 고 2 때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 저녁 집회 설교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사건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은 제 중심에서 발생한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 후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신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스도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신 새로운 삶이 시작된 나는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뜻대로 사용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기꺼이 저의 고백을 받으셨고, 저를 주님의 영광된 사역에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신 저는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삶에서의 주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고, 예림의 집의 사역도 시작되었습니다. 예림의집의 "예림"은 세 가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예수님이 임재하신 마음, 모임이란 뜻이고,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로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이며,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을 모토로 하여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돕고 있으며, 온라인 사역과 찬양사역,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가정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림의집 사역을 소개합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13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검색어를 통해 접근하여, 현재 다음 블로그 80만여 건, 네이버 블로그 40만 건의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건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4만 편이 넘는 좋은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 주시고 팔로우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5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제 이름 "김정민"을 많이 친구 추가해 주세요!
④유튜브 방송 "예림의집TV"
복음 전파와 영적 무장의 방편으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방송하며, 새벽 기도회(월-금 오전 5:00), 예림의집 이야기(월-금: 오후 5: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토: 오후 5:00)을 실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주일예배, 짤 영상 모음 등 영적 무장과 복음 전파에 관련된 영상들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예림의집TV"를 치시고 많이 오셔서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 주신 후원자 18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 후원 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6명의 선교사님과 20개의 개척교회를 기도로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 후원 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 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경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구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합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30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잠시 멈추고 준비 중이며 내년부터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2018년 가을에 발간되었습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30년간의 찬양사역의 총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 그리고 토요일에 방송되는 찬양 방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개척교회는 요청하는 수량을 무료로 제공해 드립니다.


예림의집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첫째, 유튜브 <예림의집TV>방송을 봐주시고, 다음/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이나 페이스북 <김정민>의 글을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으로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구독/좋아요/홍보"까지 해 주시면 더욱 좋겠죠.
둘째,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오셔서 회원이 되어 주시고, 여러 게시판의 글을 통해 영성 훈련을 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하셔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글들과 댓글을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셋째, 다음 카페 <사역>코너에 있는 찬양사역/선교후원사역/개척후원 사역에 적금 동참하시는 방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기도 후원과 성령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재정과 재능 후원에 동참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넷째, 여러분이 섬기는 공동체에 저를 초청하는 방법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 
다섯째, 제가 펴낸 책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구입하셔서 정독하시는 것입니다. 포털 검색창에 책 이름을 치시고, 온라인상으로는 구매하시면 됩니다. 정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하십시오!


김정민 목사
010-9442-6928
yerim21@hanamil.net
다음 카페 예림의집: http://cafe.daum.net/HomeOfYERIM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http://blog.daum.net/yerim21
네이버 블로그 예림의집: https://blog.naver.com/yerimess
유튜브 예림의집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arpDnpNgU0RQn9ksDdSPPw
후원 계좌: 농협 3560686657493(예금주: 김정민)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