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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회심

예림의집 2021. 5. 29. 21:21

사울의 회심

 

본문: 사도행전 9장 1-31절(읽기: 사도행전 9장 1-9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8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극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하자 교회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박해의 핵심 인물 중 하나는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절은 사울이 교회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기가 등등하다"라는 표현은 어떤 것에 열중하는 상태, 또는 어떤 것에 의해 고무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말은 매우 강력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사울이 교회에 대해 가졌던 최악의 적대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의 감정은 폭력적이었으며, 주의 제자들과 믿음을 말살하려는 열의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사울의 적대감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말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박해를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해 나갔습니다. 2절, 대제사장의 편지를 들고 사울은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다메섹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감옥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패배가 자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가 성령의 사역을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는 전능자 하나님의 목적을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길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질 싸움을 벌이면서도 끝가지 행합니다. 사울의 마음은 중오와 악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주님이 사울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꼭 선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만나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반역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와중이었고, 비록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주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주께서 하늘의 소리와 밝은 빛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시자, 사울은 강한 빛으로 인해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사울을 향해 4절,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울은 그 소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최소한 자신의 존경과 경외를 받을만한 분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 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을 밝혔습니다.

5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했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은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성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안다면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왜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모욕했다면 그것은 주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지금 주님과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내게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주님은 내가 느끼는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나를 모욕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 주님께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큰 관심과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일에서 나를 배려해 주시고 다른 사람이 나를 해치려 할 때 눈동자처럼 지켜주십니다. 스가랴 2장 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사울이 앞으로 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어는 도시로 가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걸을 수 있었지만, 영원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의 박해자인 사울은 성령이 시작한 사역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의 적이었던 그가 지금은 시력을 잃은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박해하기 위해 찾아다니던 그리스도 앞에 고꾸라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인지 알고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의 적이 극악무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겨 내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대적하는 어떤 적보다도 강한 분이십니다.

사울과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주님이 알려주신 도시로 갔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력을 잃은 채 3일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주님은 사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12절에 의하면, 사울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자신을 치유하고 시력을 되찾게 해 줄 사람에 관해 환상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울에게 그 3일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주님을 반역한 행동에 대해 반성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지은 죄로 인해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님은 그에게 사울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사울을 안수해서 치료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미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살마들을 잡으러 오고 있다는 소식은 물론 예루살렘에서 행한 악행에 대해서도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이 그동안 교회에 대해 행한 일을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교회를 박해했던 그 사람이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할 도구가 될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은 복음의 원천이신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자였습니다. 아나니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실지 행하지 않으실지에 대해 우리는 종종 스스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이 사울을 넘어뜨리시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실지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울에게 가서 안수했습니다.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일어나, 한때 자신이 박해했던 주님에게 헌신하는 의미로 새로운 관계를 약속하는 세례를 받게 됩니다. 사울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회당에서 자신의 새로운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임을 청중들에게 담대히 전했습니다. 22절은 사울이 더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성령으로 충만했지만, 더 강해졌다는 말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낼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박해하러 온 줄 알았던 바울의 증언은 다메섹의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사울과 베드로가 각각 성령의 권능을 받았던 과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울은 모두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는 삼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믿게 했지만, 사울의 첫 번째 설교에서는 그런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하나의 틀에 갇힌 사건으로 보십니까? 성령은 그보다는 각 개인의 상황과 삶에 맞도록 일하십니다.

 

사울의 초기 설교들은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사역을 진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이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울이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기 전에 죽여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과거의 사냥꾼이 현재는 사냥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면서 사울이 성을 떠날 때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을 안 다메섹의 성도들이 사울을 바구니에 넣어 성벽 아래로 내려주어 탈출시킴으로,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울이 성도들을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그들은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사울은 이미 교회의 박해자로 악명을 떨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침투하기 위해 술수를 쓴다고 의심했고 그런 의심의 눈초리가 사울에게 더 큰 괴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도 쫓겨났을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 사울을 도와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는 사울의 회심이 참된 것임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이 어떻게 주님을 알게 되었고 다메섹에서 어떻게 말씀을 전했는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한동안 자유롭게 예루살렘 안에서 활동하며 헬라파 유대인과 예수에 대해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성도들은 그런 사울을 보호하기 위해 다소라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이 다소는 바로 사울의 고향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때부터 13장까지 사울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울이 다소에서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시간을 보낸 것처럼 자신의 영성을 강화하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고 믿어집니다.

사울은 힘든 침묵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새로운 권능을 경험한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 광야와 같은 곳으로 쫓겨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순종하며 자신을 준비시켰습니다. 모세처럼 사울은 광야에서 사역에 필요한 성품과 자질을 수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없는 동안 교회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본문은 박해의 주역이었던 사울이 다시 박해의 대상이 되어 교회에 부담을 주었음을 암시합니다. 사울은 과거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탄의 노력도 사울이 박해자로서의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붙잡히게 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 또다시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왜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증거하지 않습니까? 본문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우리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묵상합시다. 그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어떤 갈등에 처해 있습니까? 성경 본문은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어떠한 죄인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것들보다 위대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사울처럼 하나님 앞에 죄인 중에 죄인, 괴수 중에 괴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사울의 회심 과정을 통해서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난 우리들도 주님의 도구로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