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잘못된 책략의 성, 헤스본

예림의집 2020. 7. 6. 08:40

잘못된 책략의 성, 헤스본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19km 떨어진 '히스반'이라는 마을에 '책략'이라는 뜻을 가진 헤스본성이 있습니다. 발굴 결과 이스라엘이 거주하던 철기 시대 유적과 로마 시대 유대인 무덤과 망대, 이슬람 맘루크 시대의 목욕탕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헤스본성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왕의 큰길'을 지나 교통의 요지이자 사방으로 기름진 평야를 품고 있어 길르앗 전체를 다스릴 왕도가 위치할 만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헤스본은 요단 동편의 주요한 성으로 성경에 38회 언급됩니다. 시편 기자는 "아모리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시편 136:19,21)라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당시, 헤스본 왕 시혼은 길르앗 전체를 차지한 후 모압 족속은 아르논강 남쪽으로, 암몬 족속은 동쪽으로 밀어냈습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에 들어서면서 형제 국가인 에돔, 모압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주요 도로인 '왕의 큰길'을 돌아 길르앗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요단 동편이 아니라 서편(가나안)이었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아모리인의 영토를 지나야 했기에 시온에게 평화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시혼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요단 동편에서 첫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시혼은 헤스본성의 이름 뜻대로 책략을 잘 세워 주변 나라를 정복했지만, 이스라엘 앞에서는 다번에 멸망했습니다. 시혼의 패배로 이스라엘은 길르앗 전체를 차지해 그 땅을 르우벤, 갓, 무낫세 반 지파의 요구에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 갓, 무낫세 반 지파는 길르앗을 단번에 차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단번에 빼앗길 수도 잇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약해지자 두 지파 반은 요단 동편 지역을 쉽게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사 시대 때는 미다안 족속과 암몬 족속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야합 왕이 죽은 후 모압 왕 메사는 그의 비문에 헤스본을 정복하고, 느보산 절벽에서 이스라엘 사람 7,000명을 떨어뜨려 죽였다고 자랑했습니다.

후에도 이 지역은 아람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압박했고 앗수르, 바벨론 바사, 로마에 차례로 점령당했습니다. 헤스본은 약속의 땅보다 당장 좋아 보이는 땅을 선택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후손이 얼마나 험한 세월을 살았는지 보여 줍니다. 말씀을 따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은 힘들지만 그 결과는 환난의 시간, 심판의 시간에 확연히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