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사역†/찬양팀 영성 훈련

CCM과 '컨템퍼러리'의 개념

예림의집 2020. 6. 17. 15:50

CCM과 '컨템퍼러리'의 개념

 

CCM 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CBS의 "가스펠 아워"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이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통 찬송가나 고전음악 쪽의 기독교음악을 제외한,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은 '가스펠' 또는 이를 번역한 '복음성가'로 통칭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방송 프로그램 이름도 "가스펠 아워"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가스펠 뮤직 정보가 차츰 정리되면서 우리는 '가스펠' 또는 '복음성가'란 말로는 대중적 기독교음악을 모두 표현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CCM 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CCM의 본고장인 미국의 CCM이 주로 소개되다 보니 은연중 CCM은 미국의 대중적 기독교음악을 지칭하는 것처럼 쓰여져서 미국엔 'CCM', 한국엔 '복음성가'라는 분류가 퍼졌다. 마치 미국 대중음악은 POP, 한국 대중음악은 가요... 이런 식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반 대중음악계에서 CCM의 존재를 깨달으면서 CCM을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할 때 주로 국내 가요를 하다가 크리스천 음악으로 크로스오버한 사람들 위주로 소개를 했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덕신, 최인혁보다는 하덕규, 김성호, 조하문 등의 이름이 일반 대중음악계에 먼저 알려졌다.

그 결과 사람들은 CCM을 '가요 스타일로 된 크리스천 음악' 또는 가요를 하던 이들이 크리스천 음악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생겨났다. 어떤 때는 '우리는 CCM을 지향하는 그룹입니다.'라거나 'CCM은 제대로 된 찬양이 아니야'라면서 같은 음악끼리 서로를 구별하려는 일도 일어났다. CCM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 보니 CCM을 서로 자기 잣대로 규정하는 일이 펴져버린 것이다.

사실 우리가 얘기하는 '복음성가'나 '가스펠'이나 'CCM'이나 사실상 다 한 가지 범주에 속한다고 봐도 좋다. 이것은 요즘 우리나라 가요가 구미 팝과 그 스타 일면서에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가지 범주의 음악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들이 서로 다른 범주를 가진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개념의 혼돈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서로 다른 음악을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짙어지다 보니 '저런 음악이 어떻게 크리스천 음악인가'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런 혼돈을 풀어보기 위해 가요의 예를 들어보자. 남진, 나훈아의 전성시대의 가요는 미국의 팝과 확실히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팝과 가요는 단순히 영어와 우리말의 차이만이 아닌, 뭔가 구별된 용어였다. 그러나 지금은, 김건모와 주주클럽, 에쵸티와 조성모의 노래를 듣는 지금은, 가요와 팝은 구별된 용어가 아니다. 우리 가요도 미국의 팝과 똑같이 랩, 레게, 모던록, 얼터너티브 록, 리듬 앤 블루스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던 록을 하는 가수에게 '그런 음악을 어떻게 가요라고 할 수 있나?', '그런 음악을 하면 안 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발라드나 트로트만을 해야 가요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에서 보자. 복음성가와 미국 CCM이 뭔가 구별된 듯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 복음성가와 미국 CCM의 스타일은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뭔가 더 비트가 강하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내는 음악만을 CCM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CCM은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을 거의 다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CCM의 원류인 미국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그들은 보통 '크리스천 뮤직'으로 얘기한다. '가스펠 뮤직'이 여전히 대중적인 기독교음악의 대표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실제로 '가스펠 뮤직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크리스천 뮤직'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 '크리스천 뮤직'에 '컨템퍼러리'라는 말이 더해지면서 대중적 기독교음악은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다.

 

CCM은 어떻게 그 용어가 정착되었는가?

'가스펠'이라는 전통적인 용어가 있음에도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로, 음악적인 면에서 CCM은 기존의 스타일과 다른 면을 확연히 보여준 음악이었다. 팝/록을 비롯해 새로운 스타일, 다양한 스타일을 반영하는 새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했다. 처음엔 지저스 록/지저스 뮤직 등으로 표현했지만 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혼동이 있긴 하다. 전통적인 팝 음악계에서는 여전히 '가스펠'이란 이름에 익숙해있고, 그래서 '가스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뭔가 어색한 이 음악에 '컨템퍼러리 팝 가스펠', '컨템퍼러리 록 가스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음악계에서는 '크리스천 뮤직'으로 일반화되어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내용적으로 '컨템퍼러리'한 상황을 반영하고 그 의미를 구현하는 음악을 표현하는 용어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수직적인 찬양' 또는 '자기 고백적인 믿음'을 담은 내용만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 문화상을 반영한 음악 용어, 내용의 영역을 넓힌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로 'CCM'이 필요했다.

셋째로, 산업적인 측면을 들 수 있다. 가스펠 음악이 컨템퍼러리 하게 변하면서 점차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스펠 음반산업은 상업적 유통구조에 편입됐고 나아가 여러 문화시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에 따라 '복음을 담고 있는 음악'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음악에서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장구조에 들어서 있던 '블랙 가스펠'과도 대응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CCM 이란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CCM 이란 말을 바라보고 사용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중적 기독교음악의 흐름에서, '가스펠', '복음성가', 'CCM'이란 용어가 어떻게 등장했고 쓰이고 있는가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 우리는 대중적 기독교음악의 발전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컨템퍼러리 정신과 CCM

1555년, 교황 마르첼루스 2세는 성금요일에 교황의 공식 합창단인 시스틴 성당 성가대원을 모아놓고 '속되고 지저분한' 가락을 끌어들여 가사의 분명한 전달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 그 '속되고 지저분한' 가락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다성음악이었다. 교회는 천 년 동안 단선율 성가를, 그것도 사제만이 불러왔다. 

암브로시우스 성가로부터 그레고리오 성가를 거쳐 16세기 다성음악에까지 이른 서양 교회음악은 기교와 창법에 있어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당초의 숭고하고 엄숙한 정신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이고 유희적으로 타락해 교회의 걱정을 낳았던 것이다. 시스틴 성당 성가대 지휘자였던 팔레스트리나는 얼마 안 가서 교황 바오로 4세에게 해고당했다. 다른 성가대원 두 명과 함께 '결혼한 몸'이라는 이유로 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그의 음악 때문이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고 프로테스탄트가 유럽 전역으로 번지자 가톨릭에서도 이에 맞서 스스로를 개혁하려고 했다. 반종교개혁이었다. 반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안에서 온갖 '불순물'을 씻어내려 했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도 그 '불순물' 중의 하나였다. 다성음악을 이미 추방해버린 교회도 있었다. 

급기야 로마 교회는 다성음악을 교회에서 완전히 추방하기로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거리의 속되고 야한 가락이 뒤섞인 다성음악을 예배음악으로 쓸 수 없다... 선율이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뻗어나가기 때문에 가사 전달에 방해가 된다... 하나님 말씀 전달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사탄의 음악일 뿐이다.

팔레스트리나는 자신이 지닌 온갖 음악적 재능을 쏟아붓고 열과 성을 다해 다성음악으로 예배곡을 만들어 교황에게 바쳤다. 그 작품이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였다. 이 음악은 단선율 못지않게 곱고 순결하면서도 복잡함이 복잡하지 않고 거대한 성당 내부처럼 화려하고 찬란했다. 다성음악을 반대했던 쪽이나 찬성했던 쪽이나 모두 눈을 감았다. 감동했다. 다성음악을 추방하려던 계획은 마침내 취소되었다. 

이 이야기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전설과 후대의 추정으로 엮어진 개연적 진실이다.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는 단선율 음악과 다성음악이 혼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작품은 트렌트 공의회의 작곡 지침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다성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얼마나 쓸모 있는가를 증명해냈다. 팔레스트리나는 '俗'을 '聖'으로 바꾼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400여 년 전, 이탈리아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과 행적에서 우리는 '컨템퍼러리'의 정신을 본다. 치열하고도 숭고한 그의 정신이 당대의 음악, 당대의 대표적인 문화를 승화시켜 지고한 찬양을 선보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당시 스타일로 독일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성가 '코랄'을 창안했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 리가 어떤 음악이든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기꺼이 차용해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게 했던 것도 기독교음악 중에서 '컨템퍼러리' 운동이 아니었을까...

2000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가 새로운 '聖'스러움을 만들어나가는 컨템퍼러리 운동이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CCM은 이런 흐름 속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다성음악, 팔레스트리나에서 바하, 루터에서 웨슬리...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음악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면서 변화해왔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찬송가를 가져갔고 그 찬송가는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의 곳곳에서 오랫동안 간직되기도 하고 독특하게 변형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온 흑인들은 토속적 요소와 한으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접점... 이 접점이 오늘날 대중음악의 실마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또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의 실마리이기도 했다.

 

이제 무대는 미국으로 넘어왔다.

19세기 말 대각성기간에 백인과 흑인은 함께 노래했다. 캠프 모임에서 이들은 함께 손뼉 치고 춤도 추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가스펠'이라고 부르는 노래가 나왔고 주일 예배에서 '가스펠'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의 음악은 소울, 리듬 앤 블루스로 발전해왔고 백인의 음악은 컨트리, 스탠더드 팝에 머물러있었다. 여기서 또 접점이 이뤄진다. 컨트리와 블루스는 로큰롤을 만들어냈다. 로큰롤은 세계를 휩쓸었다.

마할리아 잭슨이 블랙 가스펠을 경지로 이끌고 있을 무렵 백인의 가스펠은 컨트리 스타일의 가스펠(서던 가스펠)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로큰롤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즈음 크리스천 뮤직은 또 하나의 접점을 찾았다. 그런데 이번의 접점은 달랐다. 흑인음악과 백인 음악과의 접점을 넘어, 진리를 담은 내용과 록과의 접점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 교회와 세상에 다 열려진 접점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예수 음악 Jesus music, 예수-록 Jesus-rock으로 불렸던 이 새로운 접점의 음악은 기독교 음악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당대의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가지 않으면 예외 없이 멸망하리라는 외침도 있었고 우리 모두 예비하지 않으면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는 일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자적인 경고도 있었다. 물론 주님의 사랑과 은총도 노래했다.

컨템퍼러리 음악은 음악적으로 랄프 카마이클, 비틀스 등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전자악기와 매스 미디어의 포장도로를 달려온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컨템퍼러리 음악은 세상의 음악 흐름, 그중에서 로큰롤의 껍데기에 기독교적인 내용만을 담은 어색한 만남 이상의 것이었다. 만약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이 일반 세상 음악을 빌려와서(때로는 훔쳐 와서) 내용만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채우는 단순한 생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시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컨템퍼러리 음악은 당대의 사회와 문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꿰뚫어보고 명확하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가치관으로 지적하고 채찍질하고 나아가 해답을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은 단순한 음악적 변화를 넘어 보다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를 던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질적인 단계로 등장했다.

1965년 배리 맥가이어는 당시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그린 "파멸 전야 Eve of Destruction"을 발표했다. 이 노래는 너무 저항적이고 급진적이라고 해서 방송을 금지하는 곳이 많았음에도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노래로 떠올랐다. 이 노래 이후 배리 맥가이어는 참 구원의 문제로 질적인 도약을 했다. 1973년 배리는 "씨앗 Seeds"이라는 첫 크리스천 앨범을 냈다. 배리 맥가이어는 문제 제기와 저항을 알았고 그 참 해결책도 깨달은 접점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노래야말로 CCM의 첫 길을 다지는 노래였다.

 

  "공산 세계는 폭발하고 있습니다

   화염과 총탄이 어지러이 날립니다

   당신은 살인을 할 만큼 컸지만 아직 선거권은 없군요

   당신은 전쟁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손에 쥔 총은 무엇인가요?

   요단강마저 시체가 떠내려가는 지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지금은 결코 파멸의 전야가 아니야...

   당신은 세상을 파멸로 몰고 있으면서

   결코 종말을 믿지 않는군요"

 

"왜 이 좋은 음악을 모두 악마가 가진단 말인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연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교회뿐만 아니라 예배도 개혁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악을 개혁했다. 우선 가사를 보통 사람의 언어로 바꿨다.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라틴어에서 단순하고 쉬운 언어로 가사를 썼다. 그 가사 모델로 당시 유행했던 발라드를 들었다. 

시편 가사만을 인정하던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것이었다. 곡조도 바꿨다. 그레고리안 찬트에서 독일 민요, 대중의 노래, 심지어 메리 여왕의 찬가도 빌렸다. 루터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을 놓을 만큼 음악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그 음악은 진리를 전하는 능력에 더 중점을 둔 것이었다. 루터는 말했다. "악마 혼자서 좋은 곡조를 다 차지할 필요가 없다." 그는 젊은이들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소리 나게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다 소리 나게 하겠다고 했다.

300년 후,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쓰는 여러 가지 악기를 써서 할렐루야 밴드를 만들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전통적인 곡조를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쉬운 곡조로 연주했다. 그 곡조는 세속 곡조였다. 부쓰는 세속음악을 빌려 그 가사를 바꿨다. 그중에는 지금까지도 불리는 "그 친구 내가 알기 전I've found a friend in Jesus", "내 진정 사모하는He's the Lily of the Valley"도 있었다. 부쓰는 당대의 사람들의 언어로 된 노래를 원했다. 당대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쉬운 노래를 원했다. 그의 음악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 부쓰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좋은 곡조는 다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

다시 100년 후, 래리 노먼은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새로운 음악과 오늘의 사회를 반영하는 노랫말로 컨템퍼러리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흑인음악을 듣고 자란 래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을 듣고 가사만 세속적이었지 음악은 가스펠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음악을 다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1969년 래리 노먼은 드디어 그 음악에 사회와 문화를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분석해 광야에 외치는 가사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울타리에 갇혀있던 기독교음악의 영역을 무너뜨렸다. 쉬운 가사, 쉬운 곡조만이 아닌, 크리스천이면 진정으로 외쳐야 할 문제들을 과감히 외쳤다. 래리 노먼은 루터와 부쓰를 넘어선 것이었다. 래리도 물었다. "왜 좋은 음악은 모두 악마가 가져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