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도움
우리 중 더러는 장애인들에게 선교적 관심을 갖고 다가서지만 결과적으로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방법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위로 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본위의 도움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예수께서 여러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 치유하시는데, 결코 동일한 방법을 일률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만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안수로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고치시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두고 치유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면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그의 영적 필요를 다루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에 대해서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물로 눈을 씻으라고 처방하십니다. 아마도 이 맹인은 자신의 눈에 차가운 물기 섞인 진흙이 발라지고 다시 연못물로 그 진흙이 씻겨질 때, 구체적으로 자기 눈에서 주님의 터치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제 내 눈에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접근하시고,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실 가장 친근한 방법으로 도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만 하면 고칠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 맹인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도울지 모르면 솔직하게 질문하십시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도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맹인을 보게 하신 다음 주님은 마침내 그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그를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 38절의 이 사람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사실 우리의 이웃 사랑도 결국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친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필요요 도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작은 자들을 돕는 것을 내가 누군가를 도왔다는 도덕적 자부심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의 행복과 가치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이웃 사랑은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바리새인들의 부자연스러운 자기 자랑이나 공로 게임, 혹은 장애인 날 같은 경우에 겨우 시늉만 하는 도덕적인 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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