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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 사랑

예림의집 2019. 1. 30. 11:32

작은 자 사랑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한복음 9:1-7).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 25:40).


우리나라에서는 리조트나 유원지에 가면 입장료를 받을 때 반드시 대인과 소인을 구별하여 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대인과 소인은 나이의 차이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의 대인과 소인은 유교나 도교라는 문화적 사고의 영향을 투영하는 인격적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대인은 주로 도량이 넓고 이웃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소인은 속이 좁고 이기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대인은 때로 군자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민첩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대인 혹은 군자는 바르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소인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소인배라는 욕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삶의 스타일과 상관없이 대인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고 소인 소리를 들으면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자신을 소인, 즉 작은 자의 자리에 두시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큰 자 혹은 작은 자의 개념을 예수님은 인격적인 의미가 아닌 사회적 용납의 폭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면,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작은 자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작은 자와 동일시하십니다. 그분은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25장의 문맥에 따르면 작은 자들이란 병든 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말합니다.

제가 임의로 여기에 하나의 카테고리를 덧붙인다면, 신체의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장애인들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사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치유 이적 가운데 대부분은 바로 이런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그분의 관심과 사랑의 결과가 아니었습니까?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분의 거룩한 삶의 습관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도 결국은 한계를 가질 수박에 없는 것이어서 그들을 친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필요요 도움이 될 것이지만, 이번 장에서는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난 한 시각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장애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장애인 사랑,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