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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이제 악수를 합시다
세계적으로 악수를 잘 하는 민족으로 독일인들을 꼽습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도 악수를 하지만 대화를 하다가 의견이 맞아도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슬퍼도 악수를 합니다. 손아귀가 뻐근할 정도로 힘을 줘서 하는 악수는 기 분이 좋다는 뜻이고 손을 잡고 한참 흔들면 친밀감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손을 꼭 잡고는 한참 그 손을 놓지 않을 경우에는 특별히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제 며칠 후면 이 해를 마지막 보내는 우리, 친구와 친지들을 만나 헤어질 때
뜻깊은 송년의 악수를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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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묵상은점쾌가 아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장수했는가 단명했는가? 가문을 빛낸 후손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 이들이 얻는 거라곤 단언컨대 '헛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선공과 실패라는 잣대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수명의 길고 짧음으로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이름난 자식이 있고 없음으로 그 부모의 삶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윗 같은 신실한 어버이 밑에서 솔로몬 같은 천하의 바람둥이가 나오고, 사무엘 같은 건국의 아버지 밑에서 망나니 같은 자식들이 성장하기도 합니다. 성공의 비결을 찾기 위해 읽는 이들에게 성경은 한낱 '성공 지침서', '성공 안내서'로 전락합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구원의 여정이 아니라 성공과 번영의 지름길입니다. 성공 비법을 얻으려는 기복적 자세로 성경을 읽는 이들일수록 대체로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확인시켜주는 명확한 '시그널'이니 '표지'를 찾기 마련입니다. 말이 좋아 시그널이지, 사실상 점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점쾌 같은 시그널이나 표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안내자'를 소개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사는 삶은 언제나 '안내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요구합니다. 구원의 여정이 우리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도록 초청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보고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요한복음 9:13-23).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의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간 이유는 그가 고침을 받은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13-16절).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을 때(5:1-18)와 마찬가지로 안식일 논쟁이 다시 재연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사람을 꼭 안식일에 고치셨을까요? 그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므로 하루 더 기다렸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고침을 받아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행동임이 분명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일에 일어나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은 명백한 안식일 위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부적인 안식일 규정은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면서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부칙에 불과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규칙과 해석에 갇혀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문제 삼고자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5:17).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고침 받은 사실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했습니다.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목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더 큰 목표입니다(5:10-18). 바리새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자 눈을 뜬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서 예수님이 선지자라는 확신에 찬 답변을 듣고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17, 18절).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하고 그의 확실한 답변을 들었음에도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 사람의 부모의 말을 듣고도(20, 21절)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24절). 사실이 꼭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 보여주면 믿겠다고 기독교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이 아니라 광야생활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를 반복되는 현실로 경험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계속했습니다. 문제는 사실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완악한 데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마음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16:14; 에베소서 2:8). 그러므로 사실을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겸손한 마음을 구하십시오. 유대인들의 출교에 대한 협박 때문에 그 남자의 부모는 조심스럽게 사실을 설명합니다(20-22). 그 당시 출교는 회당에 참석하지 못함과 동시에 모든 사회적, 경제적 관계로부터 단절과 매장을 의미했기에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협박이 엄연한 진리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였기에 역사 속에서 그토록 수많은 협박과 핍박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왕성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진위 여부를 따져 보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인간은 진실보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진실을 접하고도 애써 무시하거나 폐기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갑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에 대해 맹인 자신과 이웃 그리고 심지어 그를 나아 기른 부모에게까지 증언을 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예수님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절대로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 꼭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은 증거를 들이대도 절재로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죄악되고 완악한가를 보여줍니다. 어떤 사실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는 것도 성도의 본분입니다. 나도 혹시 진리 앞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봅시다.
"아빠 아버지, 제 마음을 늘 가난하고 겸손하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주님 앞에서 교만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환경을 통해, 사건들을 통해 말씀하실 때에 민감함을 가지고 깨닫게 하소서. 주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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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D.L. 무지 지음/ 미션월드 라이브러리 펴냄 망원경으로 보는 마태복음③
두 번째 위대한 설교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며 하신 설교입니다.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곤 하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마태복음 10:8). "너희 발의 먼지를 떨쳐 버리라"(마태복음 10:14) 등의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길가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들입니다. 이렇게 야외에서 하는 설교는 정말 훌륭한 메시지가 아니면 청주의 주의를 끌기가 어렵습니다.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려면 신선하고도 지혜로운 메시지를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을 의지하여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야 합니다. 어느 젊은 설교자가 런던의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무신론자 한 사람이 대뜸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보다 가스를 발명한 사람이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하지 않습니까?" 당황한 설교자가 우물쭈물하자, 청중들은 그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 목소리를 냈습니다. "물론 저분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지요. 아마 임종을 앞두고고 가스 기술자를 부르실 것 같군요. 그러나 저는 목사임을 모셔와서 요한복음 14장을 읽어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반문하며 빈정거렸던 사람이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화 있을진저'가 여덟 번 등장하는 설교는 예수님이 유대민족에게 마지막으로 간청하신 말씀입니다. 이 설교에 나오는 여덟 가지 화를 앞서 말씀하신 팔복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이 공생에 사역 중에 하신 모든 말씀 중 가장 비통한 말씀이 아닐까요? "보라 너희 빕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태복음 23:38). 이전까지는 "내 아버지의 집" 또는 "내 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너희 집"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몇십 년 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수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아브라함이 제아무리 이삭을 사랑했다 한들,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 민족을 사랑하신 것에 비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포기하신 것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설교는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예수님의 마음이 슬픔으로 찢어질 듯하실 때 제자들은 웅장한 성전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설교는 산 위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설교는 가버나움에서, 네 번째는 성전에서, 그리고 다섯 번째 설교는 감람산 위에서 하셨습니다. 천국, 지옥, 땅, 공중, 무덤 등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마귀가 소리 지르며 고백하고, 물고기들은 그물로 들어오며,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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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찬양 지침서 김정민 지음/쿰란출판사 펴냄. 찬송은 소중한 예물①
"찬송은 예물"이란 말을 들어 보았습니까? 혹시 찬송을 예배를 준비하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 정도로 생각하고 있진 않습니까? 찬송을 예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물이란 헌금이나 교회에 필요한 물건, 즉 유형적인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찬송을 예물로 생각한다면 '준비 찬송'이라는 말도, 4절까지 있는 찬송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1절과 4절만 부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헌금할 지폐를 가운데를 잘라버리고 양 끝만 드리는 분은 없을 테니까요! 만약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찬송하는 태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신앙인들의 노래, 예배를 돕는 노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노래, 정서적으로 도움을 주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 정도로만 생각하진 않으셨는지요? 찬송이 성도들의 정서에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앞에 열거한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선물이지, 찬송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찬송의 가치를 너무 많이 왜곡시켜 왔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재로, 몇몇 신학교나 미션 스쿨에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학교는 5월에 축제를 엽니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찬양 경연 대회'입니다. 찬송을 가지고 누가 잘 부르고, 누가 더 멋지게 연주하는지 판단하고 점수를 메기는 것입니다. 참가 신청을 받고 참가비도 받습니다. 예선과 본성이 있고 심사위원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하는 데 돈을 지불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몇 날을 연습해야 합니다. 찬양 경연 대회가 '축제의 꽃'이라고 합니다. 찬양 경연 대회를 통해 축제의 분위기가 고조된다고도 합니다.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찬양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단 말입니까? 찬송을 축제를 돕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모습입니다. 둘째로, 흔히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도취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게 한두 곡의 찬송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 특징인데 북을 치고 손뼉을 치면서 성도들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끌어갑니다.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식의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고 은혜를 받은 것 같다는 이유입니다. 하루는 그런 식으로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에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은혜도 받을 수 있습니다!"였습니다. 찬송을 뜨겁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뜨겁게 찬송하는 것은 영적인 측면이지 물리적으로 몸에 열을 발산시켜서 뜨겁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이 뜨겁다고 마음 또한 뜨거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일 뿐입니다. 골방에서 조용하지만 간절히 하나님을 묵상하는 사람은 뜨거운 심령인가요, 아닌가요?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손뼉을 치고, 땀을 흘리고, 침을 튀겨야만 뜨겁게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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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홍보|예림의집을 홍보합니다♡
"예림의집”을 소개합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2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선교후원 단체입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9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음 커뮤니티 공식 파워 블로거로 활동 중이며, 현재 60만여 건이 넘는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개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2만 4천여 편의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주시고 팔로우 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2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많이 친추 해 주세요!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주신 후원자 15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후원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0명의 선교사님과 11개의 개척교회를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후원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교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양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할 계획입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25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잇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010-9442-6928, yerim21@hanmail.net).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11월 초에 발간될 예정입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려고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25년간의 찬양사역의 총 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