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날마다 힘차게 출발하게 하소서
오 주님, 감사합니다.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하게 하시니 더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생활 속에 주님이 함께 계셔서 돌보시고 지켜 주님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맞이하는 새해의 모든 날들이 주님으로부터 온 선물임을 깨달으며 하루하루를 성실한 마음으로 살고자 다짐합니다. 이 한 해를 사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셔서 삶을 지켜주시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녀들이오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대로 살기보다 먼저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서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착하며, 무엇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주님이 주시는 판단을 따라 행하게 하소서.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하고 더 많이 베풀고 섬기고 나누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들 안에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심같이 우리의 가정과 이웃과 사회가 이전보다 더 밝고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어두운 일들은 과거처럼 물러가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올해의 모든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새 아침의 해가 힘차게 솟아오름 같이 우리의 생활이 날 마다 힘차게 출발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반복된 이성 교제의 실패와 하나님의 인도
청년 시절, 나는 이성 교제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게 20대 때였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30대 초반을 지나는 시기까지도 그랬습니다. 이미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데 나는 여전히 싱글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싱글남'이지,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성 교제에 몇 차례 실패한 뒤로, 마음 깊은 곳에 쌓인 두려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라고 확신하고 교제를 시작했는데, 결과는 헤어짐으로 끝났습니다. 이런 경험이 되풀이되자, 내가 붙좇았던 하나님의 인도가 과연 맞는 것이었는지 의구심이 일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어렵고 힘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신앙공동체 선배들의 가르침과, 어찌 되었건 성경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나의 믿음이 성경책을 부여안고 씨름하게 했습니다. 이 씨름은 하나님의 뜻에 바탕을 둔 삶의 기준점 잡기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개인적인 적용으로 나를 이끌어 갔습니다. 이성 교제에 왜 실패했는지 고민하며 찾고 묵상한 성경 말씀에서 나는 하나님의 인도에는 '이별'도 포함된다는 엄청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영화 같은 만남과 로맨틱한 교제에 이은 남부럽지 않은 결혼.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인도 이전에 '내가 바라 오던' 이성 교제와 결혼에 대한 상(像)으로, 하나님의 인도라는 미명하에 감춰 놓은 나의 자기중심적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내가 '하나님이 인도해서 헤어졌다면, 그게 뭐가 문제인가?'라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편성 가득한 하나님의 뜻과 개별적인 하나님의 인도, 말씀으로 인도를 구하는 삶은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시름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인지, 아니면 저 사람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는 개별적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 두 가지가 삶에 마치는 영향력은 점점 커지지만, 내 경험으로는 개별적 인도보다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오래 간절히 기도해도 구체적이고 명료한 답보다는 두루뭉술한 답을 얻을 때가 더 많습니다. "주님, 이 여자예요, 아니면 저 여자예요?" 아무리 진지하게 구해도 결코 하나님은 "바로 저 여자"라고 답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평생 사랑할 여자를 간구하는 내게, 하나님은 도리어 "너 나 사랑하니?"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길인가요, 저 길인가요?" 하고 물을 땐 "네 인생의 주인은 누구니?"라는 반문으로 응답하셨고, 난 그럴 때마다 툴툴거렸습니다. "주님이 잘 아시잖아요. 제가 그런 고백 한두 번 했나요? 그냥 어디로 갈지만 알려 주세요." 선택의 순간마다 아무리 물어도 분명한 시그널은 없었고, '내가 네 인생의 가이드란다' 하는 응답만 되돌아왔습니다. 이게 얼마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인지 겪어 본 사람은 압니다. 답답할수록, 미궁에 빠질수록,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교제 실패 이후의 낙심되고 절박한 상황에서 특정 단어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무모하게 적용하려는 자아도취식 묵상에 쉽사리 빠질 수 있음도 알았습니다.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신 뒤 둘의 첫 만남, 아담이 하와를 보자마자 멋진 고백을 합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세기 2:23). 이 구절에서 뼈와 살에 과도하게 깊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면서, '난 살이 별로 없는 통뼈를 가진 사람이니 살 많은 여자가 내 배우자인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고침 받은 사람의 신앙고백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요한복음 9:24-34).
맹인이었다가 고침 받은 사람에게 바리새인들의 질문이 두 번째로 이어집니다(24절). 그러나 이번에는 양상이 약간 달랐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과 그 부모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예수님인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 바리새인들은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끌어갑니다(18절). 그들은 모든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했음에도 또 다른 핑계를 대면서 끝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22절). 그럼에도 그는 바리새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만을 말합니다(25절). 진정한 신앙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지도 않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분명하며 영광스럽기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고침 받은 사람은 세 번이나 같은 종류의 대답을 했지만(15,17,25절), 바리새인들은 계속 질문만 반복했습니다(26절).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고침 받은 남자는 짜증 섞인 반문을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27절).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해 놓고 모든 논의를 했기 때문에 정작 고침을 받은 당사자의 의견까지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3절). 여기서는 고침 받은 사람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부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내용(16절 상반절)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한 자신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율법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이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그는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배움의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만인에게 평등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성경의 진리를 쉽게 깨닫는 것도 아니며,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깨닫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구원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여 어떤 세상적인 자격이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슬이 시퍼런 바리새인들의 위협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겪은 일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32절).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은 주변의 위협에 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한 주님의 은혜와 영광이 너무도 분명하고 커서 주변의 문제들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핵심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예배 등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날마다 체험해야 합니다. 성도로서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에 영향력이 부족하며 나약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잘 몰라서라기보다는 주님의 크심과 영광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주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그래서 주변의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보이지 않는 신앙의 위대함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빠 아버지, 어떤 상황과 자리에서도 주님의 주되심을 당당히 고백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에 사로잡혀 핍박과 이협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의 위대함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하신일,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날마다 묵상하게 하소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속으로..|D.L. 무지 지음/ 미션월드 라이브러리 펴냄 망원경으로 보는 마가복음
사복음서는 각기 독립적인 별개의 책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베껴서 기록한 복음서는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건물을 동서남북 사면에서 바라보듯 예수님을 네 가지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마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이방인 회심자들을 대상으로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긴 설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가는 급하고 활발한 성향의 로마인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긴 메시지를 짧게 간추려 기록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가복음에는 "곧"이나 "즉시"와 같은 말이 40여 회나 등장합니다. 또한 1장, 7장, 8장, 14장을 제외한 모든 장은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듯 "그리고(And)"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다고 기록하지만, 마가는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안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표현입니다. 마가복음의 절정은 아마도 5장이 아닐까 합니다. 5장에는 예수님이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세 사람을 치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광인이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족쇄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를 무서워했을 것입니다. 무덤가는 환한 대낮에도 으스스하기 마련인데, 무덤에서 사는 귀신들린 자라니! 그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마가복음 5:7).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좋은 일을 행하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만약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다면 아마 시중에 출시된 명약은 모조리 복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효과가 없어, 불치병 진단을 받고 입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것이 온 이스라엘 땅의 명약보다도 더 효험이 있대요." 그리고 여인은 그 옷자락을 만져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전에도 수백, 수천 명이 예수님을 만졌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만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야이로의 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셨을 무렵 소녀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섭리 속에 예정된 그 시간에 예수님이 당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한 번은 장례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예수님이 장례식 설교를 하신 적이 있는지 사복음서를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장례식에서 설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방문하시면 죽은 자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기뻐하시는찬양|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찬양 지침서 김정민 지음/쿰란출판사 펴냄. 찬송은 소중한 예물②
셋째로, '엠프만능주의'입니다. 일부 찬양사역자나 부흥사들의 경우 필요 이상의 큰 고성능 앰프 시스템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리의 크기를 최고로 높여 지붕이 들썩들썩할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그들은 찬송의 소리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성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고 마침내 내용과는 상관없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히려 찬양과 예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많은 찬양사역자와 부흥사들이 소리의 크기와 영성이 비례한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도 많이 드렀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작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든지, "더욱 더 크게 불러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라고 합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 말은 거짓입니다. 결코 소리의 크기로 믿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조용히,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을 만나셨습니다. 넷째로, '성가곡 청문회'입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주일날 성가대원들의 공포의 대상입니다. 자신이 무슨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평가해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만약 한 곳이라도 틀리는 날에는 성가대원들에게 왜 죽을 쑤었냐고 책망을 합니다. 아마 그 장로님은 틀리지 않고 제대로 하는 찬송은 밥이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이나 누룽지가 되는가 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성가대원들조차 대개 그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찬소잉 끝난 후 성도들이 아멘으로 힘차게 화답하면 흐뭇해하고, 별 반응이 없으면 속으로 '오늘도 죽 쑤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서, 또는 성도들의 반응을 의식하며 선곡했고, 연습했고, 불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발견되는 '자기 취양대로'입니다. 대개 찬송을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즐기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찬송을 주님께 에물로 드린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를 위해 선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찬송을 받고싶어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취향만을 우선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찬소잉 예물입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나는 현상입니다. 제가 어느 날 한 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함께 주님을 찬양합니다. <목마른 사삼이>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하니까 한 자매임이 손을 번쩍 들고 대뜸 말합니다. "목사민, 그 찬양 이제 그만 좀 불러요. 너무 불러서 지겹습니다." 이것은 약과입니다. 심지어 일부 찬양사역자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경쾌한 곡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찬양곡을 불러 드리겠습니다!"누가 누그를 위하여 무엇을 부른단 말입니까? 이 순간 하나님은 어떠한 표정을 짓고 계실까요? 이는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촉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림의집 홍보|예림의집을 홍보합니다♡
"예림의집”을 소개합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께서 임하셔서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2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오셔서 모든 삶을 함께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림의집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워진 선교후원 단체입니다.
첫째, 온라인 선교사역 ①다음 카페 “예림의집” 다음 카페 "예림의집"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그 순간부터 저의 예림의집 사역이 동참하게 됩니다. 현재 회원 수 900여 명으로 이들이 잠정 후원자가 되어 기도 후원, 물질 후원, 재능기부 등을 하게 됩니다. 카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비전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을 합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 갑니다. 저의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시는 분은 다음 검색 창에 “예림의집”을 치세요! ②다음 블로그 “예림의집” 다음 블로그 예림의집은 따로 회원 가입을 할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와 신앙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음 커뮤니티 공식 파워 블로거로 활동 중이며, 현재 60만여 건이 넘는 방문자 수를 기록 중입니다. 다음 카페 “예림의집”과 연동되어 하루 평균 20개 이상의 정보가 업로드되어 현재 2만 4천여 편의 글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③페이스북 활동(김정민) 요즘 활성화되어있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하여 온라인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친구 초대해주시고 팔로우 해 주시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22개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친구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 동원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많이 친추 해 주세요!
둘째, 선교사/개척교회 후원 사역 이 사역은 찬양사역을 하던 저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셔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게 하신 사역입니다. 선교사님들과 개척교회를 바르게 후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선교와 교회 개척 사역에 헌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림의집 카페 회원들을 포함한 그동안 주께서 연결해주신 후원자 1500여 명이 함께 감당해 가는 사역입니다. 첫 번째, 기도후원사역은 주께서 연결해 주신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를 위해 40 명의 기도 용사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제1호 필리핀 “김성재 선교사님”과 서울 상도동 “주님의 교회”를 필두로, 현재 20명의 선교사님과 11개의 개척교회를 후원하고 있고, 그 지경을 넓혀 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물질후원사역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기도 후원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분들이 물질 후원을 하게 됩니다. 재정 후원은 선교사님과 개척교회 목회자 가정의 기초 생활비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도록 원칙을 세웠습니다. 물품 후원은 선교나 교회 개척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을 자원하여 후원하게 됩니다. 특히 도서 후원은 성경책, 신앙 도서, 아이들 학습 도서 등. 작은 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후원합니다. 세 번째, 재능기부사역은 주님께서 주신 모든 달란트를 활용하여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 지원팀, 여름 성교 학교 진행팀, 찬양팀, 자원봉사단 등이 있습니다. 모든 재능 기부 사역은 “자비량”을 원칙으로 합니다. 특히 전도 지원팀을 양성하여 개척교회를 지원할 계획입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자들이 새워질 것입니다. 선교지나 개척 현장에서 필요한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여 지원합니다.
셋째, 찬양 세미나/찬양 집회 사역 제가 약 25년간 해오던 찬양 사역의 일환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부여하신 사역입니다. 아직도 찬양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 주님을 맘껏 찬양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잇습니다. 그들에게 제가 경험한 찬양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는 사역입니다. 전국 교회, 신학교, 수련회, 대학 동아리, 중·고등학교 특별활동, 기도원 등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3개월 전에 미리 연락 주시면 언제, 어디든 달려갑니다(010-9442-6928, yerim21@hanmail.net). 그리스도인을 위한 찬양 지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이 11월 초에 발간될 예정입니다. 저는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을 만나지만, 찬송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글로써 여러분들의 곁에서 치침이 되어드리려고 합니다. 찬송에 대한 저의 지난 25년간의 찬양사역의 총 결산의 책입니다. 본 책의 내용은 앞서 설명한 다음 카페와 블로그 “예림의집”과 페이스북을 통해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예림의집 김정민 목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