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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멍에인가?

예림의집 2018. 9. 10. 09:06

무엇을 위한 멍에인가?


궁금해한 것이 더 있는데 그것은 "내게 배우라"라는 말씀 앞에 왜 "나의 멍에를 메고"라는 조건이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신 것일까요? 안식을 주겠다고 하시면서 왜 멍에를 말씀한 것일까요? 삶에 멍에를 씌워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원수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부과된 삶에 고난의 무게를 더하고 의무를 더 늘리고 고통스럽게 수많은 규율을 첨가하면서 이 세상의 즐겁고 자유스러운 모든 것을 제한하고 구속하려는 것일까요? 삶이란 또 다른 멍에로 굳이 족쇄 채우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고 눈물겨운 것이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멍에를 설명하면 사람들은 심한 오해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기서 멍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정말 멍에라는 것이 짐승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멍에란 오히려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소에게 멍에를 씌우지 않고 일을 시키면 쟁기질을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멍에를 씌우면 쟁기가가 가벼워집니다. 그러므로 멍에는 괴롭히는 도구가 아닌 은혜로운 도구입니다. 멍에는 일을 힘들게 만드는 해로운 장치가 아니라, 힘든 일을 쉽게 해주는 유익한 정치인 것입니다. 즉 고통을 주기보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노예들이 쓰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그 멍에를 쓰고 있는 이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에 대해 장황한 설교를 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멍에가 지닌 강제성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이 강제성에서 신성함의 표지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멍에를 변호하면서 반감을 누그러뜨리려 했는가 하면 멍에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결국 축복이 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어떠하든 "멍에(yoke)"라는 단어를 "고통당하고 있는" 혹은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예레미야 애가 3:27)라는 표현을 부각시킬 때 오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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