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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림의집 2018. 9. 9. 06:21

예수 그리스도의 삶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돌아볼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통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같은 고통은 주님이 무덤에 누우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내면은 유리바다 같았습니다. 언제나 그분의 삶 속에는 커다란 고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면 언제든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길가에서 사냥개 같은 자들이 괴롭힐 때도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평안을 주노라"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지니셨던 고요함을 앗아가지 못했습니다.

주님께는 불운이라는 것이 다가올 수 없었습니다. 운이라는 것이 주님께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주님은 음식이나 옷이나 돈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주님의 삶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예 걱정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람들로부터 얻는 명성에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을 모욕하는 말에도 잠잠하셨고, 욕을 하는 사람에게 다시 욕으로 대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주님의 영혼에 물결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삶은 사실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그 삶이 가능한 이유는 내면에 안식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혼과 완벽한 균형을 이루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또한 모든 긴장 사태에 대해 속사람이 전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으로 확실한 신념이 주는 안정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 안에 깊게 자리 잡은 이 안식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니 세상의 만물은 평온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명의 화가가 자신이 갖고 있는 안식의 개념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한 화가가 멀리 외로이 떨어진 산속에 있는 고요하고 외로운 호수의 모습을 그렸는가 하면 다른 화가는 폭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 속의 연약한 자작나무의 모습과 그 옆에서 억수 같은 물을 맞으며 둥우리에 앉아있는 울새 한 마리를 그렸습니다. 전자가 정체된 외로움을 그렸다면 후자는 안식을 그린 것입니다. 안식 속에는 언제나 고요와 에너지, 침묵과 소란, 창조와 파괴, 대담함과 두려움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같은 요소가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주장을 하셨다 하더라도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셨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식을 지닌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더 풍성한 삶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 삶"은 주님이 소유하셨던 진정한 삶으로 바로 온 인류에게 주신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시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직접 호소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 "진정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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