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한 성도 (대상 4:9-10)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 시간에 “귀중한 성도”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미국의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진가를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만족을 위해 세상의 온갖 것을 취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만족은 물거품과 같고, 도리어 끝없는 허무주의에 빠져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가 바로 미국의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입니다. 알려진 대로 만인의 연인이요, 수많은 남성의 우상처럼 군림했던 마릴린 먼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도 많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습니다. 수백 통의 팬레터도 매일 받습니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미래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너무나도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마릴린 먼로는 1962년 어느 날 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 닫는 해수욕장과 같다.”는 글을 남기고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최소한 부모가 나를 귀히 여긴다는 것을 잠시라고 생각했다면 이러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육신적인 행복의 조건이란 조금도 갖지 못한 한 불행한 사람이 하나님께 가장 사랑 받고 귀중한 사람이 된 사람이 나타납니다. 야베스입니다. 세상 말로 표현하면 운이 없고 팔자가 세고 날 때부터 불운을 타고난 지독하게 복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였고, 날 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성장하면서도 계속적인 환란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기도했더니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시고 지역을 넓히시고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시고 복에 복을 더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런 야베스를 가리켜 귀중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한 자가 될까요?
1. 존귀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9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이처럼 수고로이 낳아야 합니다. 성경에 수로고이 낳는다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 안에서 구원 받고 복 받은 존귀한 자라는 그 복음에 견고히 서서 행하며 싸워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갈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말씀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에서 떠나 잘못된 율법사상으로 돌아갔을 때 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진리의 복음에 서게 하는 것이 해산의 수고와 같았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예수 앞에 나아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수 앞에 나와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라는 진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자기 육신과 환경만 바라보고 예수 안의 새 자화상과 승리와 복락을 망각합니다. 진리에 선다해도 여호수아처럼 그 진리 가지고 싸워야 하는데 그것을 잘 모릅니다.
복음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그 진리를 고집하고 그 안에 서서 감사할 뿐 아니라 현실의 악과 환경을 물리치며 그 구원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승리적 복음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귀합니다.
그래서 골2:6-7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믿음으로 현실과 싸워 믿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를 정복하고 아이성을 정복하고 아모리 다섯 왕을 사로잡고 가나안 북방 남방을 모두 정복하고 가나안의 31왕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자만하지 말고 끝까지 자기 믿음을 완성할 것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전진은 믿음의 행진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져도 진리에 믿음에 서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거룩을 쟁취하고 승리를 쟁취하고 부요를 쟁취하고 건강을 쟁취하고 자유를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사람 만들기가 해산하는 수고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 되면 그는 참으로 존귀한 자입니다.
2.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9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했는데 야베스가 모든 형제보다 더 존귀한 자였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쓰이는 존귀한 자에 대한 용례를 보면 힘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왕족이나 귀족처럼 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뛰어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혹은 뛰어난 제사장이나 아주 훌륭한 율법학자에게도 붙여졌고 메시아의 영광을 묘사하는데도 쓰였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무엇을 가리킵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행1:8에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랬습니다. 권능은 권세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일지라도 세상이 악해서 성령의 능력 없이 참 성도가 될 수 없고 맡기신 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자각하지 못해서 그러지 지금 모두가 얼마나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악도 어떤 대적도 물리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갈망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과 힘과 물질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 존귀하지만 성령 충만 받은 성도가 더욱 존귀합니다. 성령 충만한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만하고 교만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19-20)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백부장 고넬료와 같이 겸손히 늘 기도하고 사랑하고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전승에 의하면 고넬료는 자기 가정과 부하들을 복음화시키고 그들과 함께 로마 복음화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얼마나 존귀하고 귀한 사람입니까?
3. 생명 바쳐 기도하는 사람이 존귀합니다.
야베스가 누구에게 기도했습니까?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야베스가 생각한 기도의 모델은 야곱이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호칭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있는데, 그 중에 야곱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야곱의 새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을까요?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 받았습니다. 그 때 천사를 붙들고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나이다 하면서 환도뼈를 쳐도 놓지 않고 천사와 끝까지 씨름하며 복을 구하다 그 이름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환난과 시련의 사람입니다. 그가 외삼촌의 집에 갈 때 너무나도 절박하여 하나님의 보장을 간구했고 20년이 지난 후에도 평안히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형이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해치러 나온 순간입니다. 이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갑자기 나타난 천사와 밤새 씨름했고 환도뼈가 부러지면서도 놓지 않고 하나님께 복을 구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이랬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겠다는 간절한 기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세에 찾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눅18:8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이 때 비유로 하신 말씀이 억울한 일 만난 과부의 간청입니다. 하나님도 두려워 않는 재판관이지만 하도 간청하니까 더 괴롭힘을 당하기 싫어서 들어줍니다. 바로 그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어떤 교사는 매일 4시간씩 나라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남북통일도 좋지만 평화협정 맺고 미군철수하여 북한의 뜻대로 되면 비극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대통령에게 충심어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강하고 담대하고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기도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귀중한 존재입니다.
4. 비전을 가진 사람이 귀합니다.
다시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을 보세요. 그의 마음에는 푸른 꿈이 보입니다. 지역을 넓게 해달라 했습니다.
이처럼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나아가 인류에게 공헌할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푸른 꿈을 가지고 하겠다는 사람이 일군이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일군이 아닙니다. 최고의 거침돌은 비전 없는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자리만 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올스톱입니다.
5. 자기를 위해서는 소박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10절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리고 야베스의 좀 더 구체적인 간구는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육신을 위한 것은 소박해도 됩니다. 여러분 잘되시기 바랍니다. 높은 사람도 되시고 성공하여 부자도 되세요.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소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섬김을 위해 가난하게 사심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이 진리가 구제 연보의 바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본을 보였습니다. 세상에서 다 받아버리면 하나님 앞에 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존귀한 성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존귀의 복음을 믿고 이 복음에 서서 끝까지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예배하다 성령 충만과 권능을 받아 예수 증인되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생명 바쳐 기도하며, 아름답고 푸른 꿈을 가지고 충성하되, 자기를 위해서는 늘 소박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ε♡з하나님께로..ε♡з > 성경,말씀,설교,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0) | 2018.06.28 |
---|---|
낙심은 없다 (시 42:1-5) (0) | 2018.06.25 |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믿음(베드로전서 2:1-2) (0) | 2018.06.20 |
말세에 나타나신 바 된 예수(베드로전서 1:20-22) (0) | 2018.06.18 |
벧엘로 올라가라 (창 35:1-5) (0) | 2018.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