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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의집 1316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2018. 6. 15. 10:58

예림의집 1316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


전화를 하다가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거나,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때는

하나님과 통화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짧은 전화에서

당신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싶은가요?

비즈니스에서의 탁월한 판단?

투자를 위한 지혜와 통찰력?

직원들과의 대화를 위한 

충분한 이해력?

무엇이든 구하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게 하지 않습니다.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자기 주인의 목소리


이어서 그 양치기 목자가 어떤 낯선 살마도 양을 속일 수 없다고 말하자 이 말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데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목자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자에게 양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느냐고 묻자 그 목자는 만약 건강이 좋지 않으면 따라갈 수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믿음이 병들고 약해지면 그들을 찾아오는 아무 선생이나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강건하면 절대 오류나 이단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외부인의 음성이 진리를 말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긴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때는 즉시 그것을 분별해 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이 사자를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드러운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려운 일들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은 부드러운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브리서 12:6)는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게는 자녀들 모두 잃은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는 평소에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성홍열이 한 사람씩 차례로 앗아가서 결국 다섯 명의 자녀들이 모두 죽게 되자, 너무나 상심한 친구 부부는 영국으로 건너가 이곳저곳을 헤매며 방황하다가 유럽 대륙을 떠돌게 되았고, 마침내는 시리아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한 양치기가 양떼들을 불러 개울을 건너가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양떼들은 둑 아래로 내려가서 흐르는 물을 처다보더니 물살을 보고 겁내는 것 같았습니다. 양떼들은 양치기가 불러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양치기는 어린 양 한마리를 들어 올려 한 팔에 안고 또 다른 어린 양을 들어 다른 팔에 안고는 개울을 건너갔습니다. 그라자 늙은 양들은 더 이상 물을 바라보고 서 있지 않고 그 목자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양떼는 모두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더 새롭고 신선한 초장을 다라가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면서 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대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어린 양들을 하나씩 하나씩 저편 세상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불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잃어버린 사랑스런 자녀들을 따라가게 될 때를 그들은 학수고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사랑했던 이들이 먼저 가버리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소망을 "위에 있는 것에 두기 위하여"(골로새서 3:2) 당신을 부르고 계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 신실하기 바랍니다. 아직까지도 그분은 당신의 목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 즉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중재자이시며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지를 말하려면 여러 권의 책을 써야 될지 모르겟습니다. 버는 가끔 시를 쓰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시를 쓸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저의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언제 쓰게 되었는지, 어떤 상태에서 쓰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그러나 이 글이 나의 영혼을 너무나 새롭게 하기에 당시에게도 곡 알려주고 싶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염려가 맡겨질 때까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많은 성도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염려를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염려가 왜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염려한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염려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하룻 있겠느냐"(마태복음 6:27). 염려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살메 심히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누가복음 21: 34). 우리는 술 취하고 방당한 생활은 당연히 문제라고 여기지만 생활의 염려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염려를 술취함과 방탕한 것과 동일한 문제로 여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반대말을 불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반대말은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딸 아이를 키울 때 병원에 데려가 주사를 맞게 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병원 가는 날이면 딸아이는 벌서부터 표정이 우울하고 아침도 잘 먹지 않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의사가 딸아이 보고 "주사 안 맞아도 된다."라고 말하고 나니 너무나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사 맞을 일이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주사, 오히려 몸에 유익한 것인데도 어린아이 마음에는 염려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는 아이의 모든 기쁨을 다 가져가고, 입맛도 없게 만들고, 하루 종일 시달리게 했습니다. 우리의 열려가 꼭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염려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꼭 이와 같습니다.


염려는 율리적인 죄는 아니지만 한나님과의 관계를 개뜨리는 영적인 죄입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8).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해서 늘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무시당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염려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생활의 염려가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삶의 열매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10년, 20년을 해도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합니다. 염려가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 내리고 자라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3:22).

염려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생활의 염려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염려하면 할수록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여력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염려하며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몀 염려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염려는 타락한 본성에서 자영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으로는 염려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여자 성도들과 제자훈련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앞으로 한 주간 동안 염려하지 말고 살아 보자는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제자훈련 시간에 한 집사에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은 뜻밖이었습니다.

"목사님, 저 지난 한 주간 동안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목사님, 저는 남편 때문에 늘 염려가 많았습니다. 남편이 손대는 일마다 시패를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자난주에 제 남편이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고 또 나서지 않겠어요? 목사님은 염려하지 말고 살라고 하셨지만 지난 한 주간 동안 저는 염려를 하지 않을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한 주간을 보냈는데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차라리 마음껏 염려라도 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염려를 하지 말라는 숙제 때문에 며려도 못하겠고 ... 목사님, 저는 '염려 체질'인 것 같아요. 오늘로서 숙제는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염려라도 마음껏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7). 염려를 해결하는 길은 주님께 염려를 맡기는 길뿐입니다. 정말 주님께 염려를 맡길 수 있을가요? 만약 통장에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웬만한 문제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에 염려가 맡겨졌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함게 계시는 주님을 믿는 만큼 염려를 그분게 맡길 수 있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믿음이 임하면 마음 안에 있던 염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2:2).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볼수록 믿음은 더 커지고, 우리 안의 믿음이 커질수록 염려는 점점 줄어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만큼 염려가 맡겨지는 것입니다.

염려가 떠나기가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서도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문제만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환경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망므과 생각을 평강으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 7).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신앙 생활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의식주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장래 문제,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평안하고 기쁠 수 없습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복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몇 년 전에 소천하신 이상춘 장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교정직 공무원으로 일하시다 은퇴 이후에도 여주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회복될 기능성이 없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침대에 누워 있느니 죽는 날까지 재소자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에서부터 여주교도소까지는 버스를 타고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아것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소자들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올려 드렸다고 합니다.

"제 인생에서 꼭 한 번 해 보고 싶고, 가져 보고 싶고, 되어 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제 마음은 그 모든 것을 가져 보고, 되어 보고, 다 해본 사람들보다 몇 배나 행복합니다. 이 처지에, 이 땅에 보람을 느끼며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고 죽음 이후에는 천국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힘겨운 투병 중에도 자신의 육싱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저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 겁니까?"라고 기도하며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이상춘 장로는 병원 진단과 달리 기적같이 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 아가페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예수님을 전했는데, 이중 30%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맡기고 하나님 나를 이해 힘써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아빠 아버지... 아빠 아버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깁니다. 그것이 외 이렇게 어려운지요. 주님은 항상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하셨것만 그러지 못하는 나는 믿음이 작은가 봅니다. 주님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염려가 맡겨질 때까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내 마음 심장에 새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 영성 훈련|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 정수환 목사

두 눈(目)과 두 귀(耳)


샬롬! 늘 건강하고 평안하심을 기원합니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본 동영상 광경입니다. 한 여인이 말 등에 올라타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말(馬)이 앞다리를 구부리고 낮은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여인이 쉽사리 올라탈 수 있게 해줬습니다. 여인이 무사히 올라타자, 비로소 말은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한쪽 귀와 한쪽 눈의 기능이 상실된 채 40여년을 사셨습니다. 한쪽 폐도 결핵 때문에 20대부터 역할을 멈췄고, 대장(大腸)마저 암수술로 제거했습니다. 신체의 거의 절반만 기능을 유지하며 90평생을 사신 셈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쪽 눈만으로도 눈 감으시기 며칠 전까지 책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손주들의 재롱을 한없는 사랑으로 눈에 담으셨습니다. 한쪽 귀로는 정원에 앉아 새의 지저귐과 얼굴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감탄하셨습니다. 물론, 어머니의 잔소리는 못 들은 척하셨습니다. 몇 달 전, 선배 한 분이 불의의 의료사고로 한쪽 귀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저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잃는 것만큼 얻게 되는 것도 있잖을까?’하고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두 눈과 두 귀를 선물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두 눈과 두 귀 중에서 하나를 잃더라도, 나머지 한쪽만으로 듣고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움과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저의 아버지처럼(출처; 샘터, 김성구)


우리 몸은 온통 신비(神祕)로 가득합니다. 생명을 다할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면서 우리 몸을 잘 사용해야 할 겁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아이 성격에 따른 육아법


너무 순한 아이

아이가 너무 순해서 혹시 커서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순종적으로 살게 될까 봐 걱정이세요? 자기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남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커서도 그런 성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성적으로 착하고 부드러운 성향을 가진 것 뿐이지요. 굳이 바꿔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남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자기 것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인식시켜주면 됩니다. 다만, 다른 아이의 행동에 스스로 방어할 수 없어 힘들어 한다면 엄마가 어느 정도 도와줄 필요는 있습니다.

 

공격적인 아이 

친구들을 때리고 미는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나이 또래들의 특성으로 볼 수 있지만,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를 찾아서 줄여주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좋은 행동은 격려와 칭찬을 하되,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화를 내지 말고, 단호하게 일관되게 대처해야 아이가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모가 평소에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세요. 공격적인 행동은 좌절감과 관련이 있으므로 아이가 좌절감을 느끼지 않도록 평소에 격려와 칭찬을 충분 하게 해 주세요

 

잘 깨무는 아이 

화가 날 때 남을 물어버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때리는 것과 같은 행동인데, 이렇게 해 보세요. 배가 고파서 물어버리는 경우도 있으므로 씹어 먹을 것을 줘 보세요. 무는 행동을 발견한 즉시 그 자리에서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가르치세요. 고함치거나 윽박지르지 말고 단호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귀엽 다고 웃어 넘기다가 나중에 야단을 치면, 아이는 혼란스러워 하므로 처음부터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 고, 엄마와 아빠는 아이가 귀엽다고 깨물면서 아이가 했을 때는 나쁜 행동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혼란스러워 하므로 엄마아빠도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혼자 노는 아이 

또래 친구에게 관심은 있지만 아직은 혼자 노는 것이 익숙합니다. 이렇게 사회성을 길러주세요. 친구들과 어울리기 전에 먼저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도 가족의 한 사람임을 알려주어 가족들 사이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그저 자신이 만지면 소리나고 움직이는 사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세요. 

 

산만한 아이 

아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은 아주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고쳐 주세요. 주변 환경 자체가 아이들 마음을 산만하게 해서 주의집중을 못하게 하는 원인인지 살펴보고 원인을 없애주세요. 책을 읽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TV를 틀어 놓으면 당연히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아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TV를 꺼 주세요.

 

의존적인 아이 

혼자서 뭔가를 하려고 노력했는데, 번번히 잘 되지 않거나 엄마가 없을 때의 불안을 경험한 아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 보세요. 동화책보기, 놀이 등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충분하게 늘여 보세요. 아이는 차츰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졸졸 따라다니는 시기는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 못하게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세요.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옆에 없어도 불안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항상 부정적인 아이 

무언가를 물으면 항상 "아니, 안 돼, 싫어"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만 1세~2세 사이의 아이들에게 대부분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모 자신이 평소에 부정적인 말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이는 부모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게 됩니다. 명령하듯이 강압적으로 말하면 반발심이 생기므로 항상 부드럽게 말하세요. 질문을 할 때, "~할래?"라고 묻지 말고, "~할 래? ~~할래?"로 물어서 부정적인 말을 사용할 상황을 만들지 마세요. 긍정적인 행동이나 말을 했을 때 다시 하게끔 칭찬을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