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신약신학

연대순으로 정리한 복음서

예림의집 2018. 6. 14. 15:10

연대순으로 정리한 복음서


문학적 맥락

이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역사적 상황-특수 고찰에서 어느 정도 언급한 바 있다. 문학적 맥락은 어느 한 복음서의 문맥에서 특정 단편 단위(a given pericope)의 위치(place)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 문학적인 맥락은 어느 정도 복음서 저자들에게 알려진 원래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복음서에 있는 수많은 자료들이 현재의 문맥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따라 배열한 데 그 이유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제시하려는 목적은 두 가지다. (1) 독자들이 복음서의 현 문맥에 위치한 각 설화들을 석의하거나 읽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2) 복음서의 전체 구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복음서의 한 부분을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제반 사실들과 상관없이 해석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개별 단락 해석하기

서신서 해석 방법을 논의함에 있어 우리는 '문단별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특히 복음서의 큰 단락의 가르침과 같은 부분을 해석할 때는 이따금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복음서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앞에서 우리가 지적한 대로, 이같은 복음서의 가르침 단락들은 서신서 해석방법과 어느 정도 유사할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는 그 고유한 성격상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단지 우리가 복음서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해석하거나 읽을 때 앞에서 지적한 복음서에 대한 두 가지 사실, 즉 네 개의 복음서가 있으며, 그것들은 '두 차원’으로 된 문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수평적으로 사고하라.

복음서를 수평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은 어떤 한 복음서의 단편을 연구할 때 다른 복음서에 있는 병행 구절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복음서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를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며 읽기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를 너무 지나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정경 안에 네 개의 복음서를 주셨다는 사실은 곧 그 복음서들을 각기 독립적으로 읽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우선 주의사항을 언급해야겠다. 병행적으로 복음서를 연구하는 목적은 한 복음서에 기록된 어떤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의 세부적인 설명들로 메우려는 데 있지 않다. 종종 사실들을 조화시키는 쪽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성령께서 영감을 하신 각 복음서의 독특성이 흐려지게 된다. 이렇게 '메우는’ 작업은 역사적 예수 연구 수준에서는 흥미 있는 것일 수는 있으나,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정경적인 수준(canonical level),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각 복음서의 특징을 강조하는 수준에서는 그렇지 않다.

수평적으로 사고해야 할 기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병행구들은 종종 우리들에게 각 복음서의 독특성을 인식하게 해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 네 권의 복음서를 갖게 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각각의 복음서가 지닌 독특성들 때문이다. 둘째, 그 병행구들은 우리가 동일한 또는 유사한 자료들이 교회들에서 존속했던 각기 다른 종류의 문맥들을 인식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것들을 하나 하나 예를 들어 보일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전제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설령 독자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할지라도, 복음서들 간의 상호 관련성에 관한 아무 전제 없이 복음서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상식에 속하면서도 거의 가능성이 희박한 전제가 바로 각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도 분명해서, 복음서를 읽을 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기록 뿐만 아니라 설화들 (narratives)에서도 언어적 유사성이 뚜렷하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보자. '결코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spake as never man spake) 사람의 어록들이 놀라울 만큼 언어적으로 유사하다고 해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설화로 담는다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특별히 다음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①처음엔 이 이야기들을 아람어로 들었으나, 우리는 지금 헬라어 단어들의 용례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② 헬라어의 어순은 대단히 자유롭지만 종종 그 유사성은 세부적인 어순에까지 확대된다. ③세 명이 로마 제국의 각기 다른 세 지역에서 동일한 용어들을 가지고 동일한 이야기를 말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것도 심지어 전치사나 접속사에 이르는 개별 문체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공관 복음서에서 거듭 나타나고 있다. 오천 명을 먹인 설화를 쉽게 예로 들 수 있다. 이 설화는 네 복음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몇 안 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서, 다음의 통계를 통해 우리는 처음 세 복음서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 오병이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의 수 

마태복음 157 

마가복음 194 

누가복음 153 

요한복음 199


2. 처음에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사용한 단어의 수: 53


3. 요한복음과 나머지 세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의 수:

8(다섯, 두, 오천, 떡을 가지사, 열두 바구니 등)


4. 상호 관계에 대한 백분율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일치 59%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일치 44%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일치 40%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의 일치 8.5%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의 일치 8.5%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의 일치 65%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요한은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요한은 동일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도 꼭 필요한 단어들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마저 공관복음서와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나머지 세 복음서는 어떤 면으로든지 분명히 상호 의존적이다. 헬라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두 저자가 60%나 단어를 일치시키고 게다가 정확한 어순까지 지켜가면서 동일한 이야기를 독자적인 설화 형태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개연성 없는 일인지를 인정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마가복음 13:14과 그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24:15의 단어들에서 들어보자.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이 단어들이 구전의 일부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읽는 자라고 되어 있고, 듣는 자라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더 초기의 형태-마가복음-에는 다니엘서에 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은 다니엘서를 지칭하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복음서 저자 중 한 명이 자신의 독자를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 속에 삽입한 것이다. 게다가 두 저자가 독자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는데 동일한 괄호를 사용하여 독립적으로 삽입시켰다고 볼 가능성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납득할 만한 설명은, 우리가 앞에서 제시하였던 것처럼, 마가가 복음서를 맨 처음 기록-적어도 베드로의 설교와 가르침을 부분적으로나마 맨 먼저 수집-하였다는 것이다. 누가와 마태는 마가복음 을 접했고, 그것을 자신의 복음서의 기본적인 자료로 독자적으로 사용하였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 이외에도 예수님에 관한 다른 여러 자료들을 접하였는데, 그 자료들 중에는 마태와 누가가 공동으로 사용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공동으로 사용한 자료는 두 복음서에 동일한 순서로는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곧 마태와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이들 세 복음서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복음서를 기록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그의 복음서에는 세 복음서와 공유하는 자료가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복음서를 기록하실 때 영감하신 방법이다. 이러한 사실이 복음서 해석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다음의 간략한 예를 통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 이 다음의 병행 구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주목하라.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말씀이 세 복음서 모두에 아주 똑같은 순서로 감람산 강설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가는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독자들에게 예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하고 있다. 

마태 역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좀 더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 다니엘서에 언급된 것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서지 못할 곳’(마가의 표현)은 거룩한 곳’(예루살렘 성전)을 뜻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누가도 동일하게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 전체 말씀을 그의 이방인 독자들을 위하여 단순하게 해석해 주고 있다. 누가는 그들이 참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의도하신 것은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는 것이었다.

이제 독자는 수평적으로 사고하고,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가 복음서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읽고 해석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병행 구절들을 인식하고 있으면, 동일한 자료들이 종종 초대 교회에서 어떻게 새로운 문맥에서 각기 다르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발견되지는 않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록들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을 예로 들어보자. 그 어록(saying)은 두 복음서에 거의 자구적인 대응 관계(word for word)를 가지고 등장한다. 누가복음 13:34, 35에 있는 예수께서 우신 장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눅 9:51-19:10) 하신 설화들과 가르침을 모아놓은 긴 수집물의 일부다. 이 구절은 헤롯에 대한 경고에 곧이어 나온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는 이 경고는 헤롯에 대해 응답하시며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거부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 위에 심판이 내린 것이다.

마태복음 23:37^9에서 그 탄식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곱 개의 화(禍) 선언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 화들 가운데 마지막 화는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선지자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 경우에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은 다른 문맥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두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다른 여러 어록들도 이와 동일하다. 주기도문은 두 복음서에서 기도를 가르치는 문맥에 위치하고 있으나(마 6:7-13: 눅 11:2-4), 각각의 요점은 상당히 다르다. 마태는 이 주기도문이 기도의 모델 역할을 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제시하고 있으나, 누가는 반복해서 기도할 것처럼 제시한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마찬가지 현상이 팔 복에서도 나타난다(마 5:3-11;눅 6:20-23). 마태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란 '심령이 가난한 자‘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너희 부요한 자’(6:24) 와 반대되는 '너희 가난한 자‘(6:20)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경을 반쪽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처럼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단지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만 읽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오로지 '너희 가난한 자‘로만 읽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가 정경임을 보여야 한다. 진실로 심오한 의미에서 진정으로 가난한 자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곤궁한 자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사렛의 예수로 성육신하신 성경의 하나님은 억눌리고 자기의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을 신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의 이러한 측면(참조. 14:12-14: 12:33-34과 그 병행 구절인 마 6:19-21을 비교해 보라)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모르고는 누가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수평적으로 사고하라는 것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서를 신중히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공관복음 대조표-복음서를 병행 구절별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열거한 도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공관복음 대조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Kurt Aland가 편집한 Synopsis of the Four Gospel(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5)이다(이 책은 희랍어와 그 영역(英譯)을 동시에 싣고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신학도나 영어를 시용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책이나, 한국 독자들이 참고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최근에 국역으로 나온 고전적인 복음서대조서가 있는데, 이것을 이용하더라도 독자는 많은 도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A. T. 로버트슨. 「복음서대조서」_ 역자주)


수직적으로 사고하라.

수직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은, 복음서의 설화나 교훈을 읽거나 연구할 때 , 그것의 두 역사적 상황=예수께서 처한 역사적 상황과 복음서 기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모두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먼저 주의사항부터 언급해야겠다.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목적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해 참으로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형태로 된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지, 우리가 재구성한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도를 넘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복음서의 많은 자료들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서 현재의 문맥에 배치되었고, 건전한 해석을 위해서는 어떤 본문을 현재의 정경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입문으로서, 먼저 그 본문이 처한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마태복음 20:1-16의 예수께서 포도원 품꾼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의 관심은 마태복음의 현재 문맥에서 이 본문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먼저 수평적으로 사고한다면, 우리는 마태복음의 비유 전후에 있는 긴 단락의 자료들을 살필 것이고, 여기서 마태가 마가복음을 거의 다 참고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마 19:1-30: 20:17-34와 그 병행 구절인 막 10:1-52). 

마가복음 10:31에 있는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는 구절을 마태는 거의 수정없이 19:30에 표기하였다. 하지만 마태는 바로 그곳에 이 비유를 삽입시켰다. 20:16에 19:30에 있는 결론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되 이번에는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복음에서는 이 비유의 직접적인 문맥이 처음 된 자들과 나중 된 자들 사이의 순서 바뀜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1-15)를 제대로 눈여겨 보면, 그 비유는 주인이 베푼 관용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음에 주목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세서의 대가는 공정 원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이 비유는 원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트집 잡는 상황에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종일토록 수고와 더위를 견딘’ 자들이기에 더 많은 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그러우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인들’ 을 용납하시는 것과 똑같이 죄인들을 기꺼이 용납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장 원래의 문맥에 근접한 상황이라면, 이 비유가 마태복음에서는 지금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관용이라는 이 비유의 요점은 분명 여기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 비유가 제자도의 문맥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자들은 나중 된 자들이었으나, 사실은 이미 먼저 된 자들이다. 

이 요점은 아마도 유대 지도자들과 대조시키는 것일 것이며, 마태는 이것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물론, 수직적으로 아주 많이 생각하다 보면, 동일한 요지가 예수님이 처한 상황과 복음서 기자들이 처한 상황 모두에 적용되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위에 제시한 예는 이와 같은 사고가 석의로 인해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복음서를 전체로 해석함

문학적 문맥 연구에 중요한 분야는, 각 복음서가 독특하게 기록되게 한 여러 관심들을 살피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복음서를 읽고 연구할 때 독자는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리고 그분이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왜 그 이야기를 자기 독자들에게 다시 말하는지를 아주 신중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알기로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히 편집자가 아니라 저자들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그들이 자료들을 만들어낸 자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몇 가지 요소들, 가령 다소 간의 자료의 고정된 성격과 그 자료들이 전달되는 과정 가운데 미친 성령의 주권적인 간섭은 저자가 지나치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독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료를 창조적으로 구성하고 재서술하였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저자들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들은 독자들이 복음서를 읽고 연구할 때 복음서 기자의 저작 관심과 방법을 이해 할수 있도록 돕는 데 관심이 있다.

복음서 기록에 작용한 원칙이 세 가지 있다. 선별\과 배열과 각색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으로는, 복음서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저자들로서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설화들과 교훈들을 선별하였다. 물론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자료들을 보존하는 것도 여러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양은 적지만 비교적 좀더 확대된 설화와 강설들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이 특별히 얼마나 자료를 정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20:30, 31;21:24). 요한복음 21:25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아마도 다른 저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누가는 마가복음의 상당 부분(막 6:45-8:26)을 포함시키지 않기로 선택하였다.

동시에 복음서 저자들과 그 교회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관심을 따라 선별한 것을 배열하고 각색하였다. 예를 들면, 요한은 우리에게 특별히 자신의 목적이 신학적이었음을 공공연히 알려주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20:31). 

유대인의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관심 때문에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거의 모든 사역이 갈릴리에 집중된 것과는 달리, 요한의 자료는 대부분 유대와 예루살렘 사역과 관계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진정한 고향은 예루살렘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언젠가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다고 말씀 하신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이것은 원래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셨을 때(마 13:57: 막 6:4: 눅 4:24) 하신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배척받는 것을 설명(4:44)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단히 심오한 신학적 통찰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각색의 원리는 또한 복음서들 사이의 소위 불일치들을 대부분 설명해 준다. 예를 들면, 그 불일치들 가운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있다(막 11:12-14, 20-25; 마 21:18-22). 마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상징적인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마르게 한 사건 사이에 성전 청결을 통해서 유대교에 동일한 심판을 선언하고 계심에 주목하라. 

그러나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신앙에 관한 교훈으로 결론을 맺고 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게도 대단히 중요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신앙에 관한 교훈이 본 이야기의 유일한 관심사다. 그래서, 마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과 잎이 마른 것을 신앙 강조를 위해 연결시키고 있다. 아울러 두 복음서에서 이런 식으로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두 복음서 기자를 영감하신 성령의 사역임을 기억하라.

좀더 광범위하게 이러한 저작 과정을 예증하기 위해서 마가복음의 앞 몇 장(막 1:14-3:6)을 살펴보자. 이 장들은 아주 잘 구성된 예술적인 걸작이기에, 많은 독자들이 마가가 어떻게 구성했는지는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마가의 요지만은 잘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는 세 단계가 있다: 군중들에게 인기를 얻으시던 때. 소수에게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시던 때, 그리고 교권에 의해 반대를 받으시던 때. 마가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설화들을 선별하고 배열하여 우리들 앞에 제시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선언(1:14, 15)이 있은 후, 처음 설화는 첫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주제는 다음 항목들에서 좀 더 세분화 되고 있다(3:13-19: 4:10-12; 4:33-41 등등). 마가복음의 처음 두 장에서는 마가가 다른 두 항목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1:21에서 시작 하여 1:45에 이르기까지 마가가 가지고 있는 단편들은 네 개다. 

가버나움에서의 하루(1:21-28과 29-34), 다음날 짧은 설교 여행(1:35-39), 그리고 문둥병 환자를 고친 이야기(1:40나5). 이 기사들 속에 나타나는 공통되는 주제는 예수님의 명성과 인기가 급속도로 퍼진다는 것이며(참조. 27, 28, 32, 33, 37, 45절), 그 인기는 예수께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오는”(1:45) 것으로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깜짝 놀랄 만한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가는 이 장면을 단지 네 개의 설화로만 그리고 있으며, 거기에 그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문구인 ‘그리고 곧’ (1:21, 23, 38, 29, 31, 42절 < 유감스럽게도 NIV와 한글개역 성경엔 이 문구가 빠져 있다-역자주>)과 매 문장을 시작할 때마다 사용한 접속사 ‘그리고’ (이것도 역시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었다)를 추가했을 뿐이다.

우리들 앞에 제시된 이러한 장면들과 함께 마가는 다음으로 다른 유의 설화들 다섯 개를 선별하여 반대 장면을 묘사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처음 네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은 ‘어찌하여’(Why)라는 질문이다(2:7, 16, 18, 24). 예수께서 죄를 사하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금식의 유전을 무시하고 또 안식일을 '범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했다. 안식일을 범한 이 마지막 문제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유전을 철저하게 모독한 것으로 여겼음이 마가가 첨부한 이러한 종류의 두 번째 설화를 통해 분명해진다(3:1~6).


4복음서의 내용을 하나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이 마가복음, 마가복음 다음이 누가복음, 누가복음 다음이 요한복음, 이런 순서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런 순서로 되어있는 것처럼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일생’ 이라는 한 가지 사건을 네 사람이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 세 복음서를 공관(共觀) 복음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사건을 함께 보고 기록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태여 읽는 순서를 매긴다면 마태복음 다음에 사도행전, 마가복음 다음에도 사도행전, 누가복음 다음에도 사도행전, 요한복음 다음에도 사도행전을 읽어야 순서가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이 네 가지 복음서가 오늘날 남겨졌을까요? 이 각 각의 복음서들이 남겨졌다는 사실은 곧 ‘예수사건’ 이 진짜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네 명의 저자가 어느 날 한 자리에 앉아서 의논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각각 자신의 삶을 살다가 기록한 것인데 후대에 모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저자가 그들 나름대로의 상황 속에서 썼고, 그 쓰여진 ‘예수사건’이 성도들에게 회람되어 읽혀졌습니다. 그러다가 A.D. 397년 카르타고 공회에서 27권의 신약성경이 확정될 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 네 권이 복음서로 채택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외관적으로는 종교회의가 성경의 정경 여부를 결정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성경 자체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경으로 공인된 성경들이 그 자체에 정경임을 증거하는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회의는 다만 그 사실을 공인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4복음서가 정경으로 최종 채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들은 고민이 되는 겁니다. 거의 똑같은 내용을 네 번이나 읽고 나도 뭔가 모르게 산만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읽어도 읽어도 한 줄로 주욱 연결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일어난 순서대로 다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 정리가 안 됩니다.

마태복음 읽고. 마가복음 읽고. 누가복음 읽고… 이렇게 한 권 한 권을 읽어왔던 방법으로는 예수님의 행적 전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태에 있는 것이 요한에 없고. 마가에 있는 내용이 누가에는 없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복음서 동네는 알기는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늘 뭔가 섞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에는 실제로 일어 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강론도 있고. 비유와 설교, 논쟁 형식의 글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이 네 권의 복음서를 다 벌여 놓고 공생애 3년 동안의 예수님의 행적을 시간을 따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구약에서도 그 흐름을 찾으려고 했듯이 예수님의 행적도 그렇게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4복음서를 왔다 갔다 하며 예수님의 생애를 한 눈에 보이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시간적으로 정확 하지 않은 사건들도 많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들 을 참고해서 복음서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시간과 장소의 이해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


틀 만들기: 시간개념과 공간개념

틀을 잡는다는 것은 전체윤곽을 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간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사건이 몇 시에 일어났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야 합니다.) 3년 간의 일을 크게 잡아 시간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틀을 잡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시간적인 힌트를 보이고 있는 확실한 근거를 찾아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유월절”이라는 명절입니다.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4월에 있는 명절입니다. (이 명절을 바둑알로 생각하고 우선 시간선상에다가 한 알. 한 알 놓아봅시다. 바둑알이 몇 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공생애 3년이기 때문에 세 알 만 놓으면 될 것 같지만 만 3년의 공생애를 지나기 위해서는 유월절이 네 번 지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가로로 그어 시간선상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다가 유월절①. 유월절②, 유월절③. 유월절④라는 네 개의 바둑알로 간격을 맞춰 자리 잡아 놓읍시다. 이 유월절들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님의 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지 추적해보자는 말입니다. ’

유월절① 요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

유월절②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월절③ 요 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5병2어) 

갈릴리 사역 - 초막절 직전 가이사랴 빌립보 MT(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첫 번째 수난 예고-가이사랴 빌립보) 마16:13-28 막 8:27-9:1 눅 9:18-27

유월절④ 요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또 공간개념이 있다 그랬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구네 집이냐, 들판 이냐, 바닷가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틀을 잡는 중이니까 크게 봐야 합니다. 가장 크게 경계를 구분한다면 예수님의 활동이 갈릴리 지역이냐, 아니면 유대 예루살렘 지역이냐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법적으로 로마 영토입니다. 로마가 뺏은 거지요. 

이 땅은 행정구역이 크게 세 도(道)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맨 위에 갈릴리 바다 근처의 갈릴리도, 중간이 사마리아도, 그 아래가 유대도입니다. 이 유대도는 수도 예루살렘을 품고 있습니다. 맨 위 갈릴리도에서 이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사흘길입니다.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도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살지 않았고 거쳐 지나갔으니까 이제 예수님의 스토리를 공부할 때는 갈릴리냐. 아니면 예루살렘 유대지역이냐가 큰 범위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스토리를 공부할 때 지명들이 수없이 많이 나읍니다. 예를 들면 가나. 나사렛, 가버나움, 베들레헴 등등… 그런데 행적구역상 크게 세 도(道)로 나뉘어진 갈릴리, 사마리아,유대,이 세 지명은 급이 다르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냥 모든 지명들이랑 뒤범벅이 되면 안됩니다. 도(道)입니다. 우리나라도 팔도(道)강산이라고 말하잖아요. '경상도’는 ‘안동' ’밀양‘과는 다른 급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정복하기 위해서 갈릴리냐, 예루살렘이냐가 크게 공간적인 범주라는 것 절대 잊지마십시오. 지도에서 어디를 가리키는지 눈으로 꼭 확인해 두어야 합니다. 지도에 보면 다른 지명보다 굵은 글씨로 갈릴리’하고 띄엄띄엄 쓰여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아래쪽로 내려가면 ‘유대’하고 역시 띄엄띄엄 쓰여있습니다. 갈릴리가 동네이름이 아닙니다. 유대가 동네 이름이 아닙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안에 있는 동네이름입니다. 베들레헴은 유대지역 안에 있는 동네이름입니다. 타운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잘 구분 못하고 성경을 읽는 것, 그게 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크게 갈릴리 지역이었는지. 유대의 예루살렘 지역이었는지, 이 공간개념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요 1:43)” 하면 지금까지 유대지역에 계셨었다는 말입니다. 장거리 여행입니다.

갈릴리 사역인가 예루살렘 사역인가를 구분짓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질문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중요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부터 살던 곳입니다. 저 아래 유대지역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내려갔다가 예수를 낳은 다음 이집트로 피신한 후 다시 이 나사렛에 올라와 삽니다. 고향입니다. 시골입니다. 그에 반해서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무엇보다도 종교의 중심입니다. 기득권자들이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는 수도입니다. 로마와 연관 된 정치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로마의 문화가 접속되어 있는 곳입니다. 

신구약 중간기 특히 예수님 탄생하기 약 150년 전부터 형성된 새로운 유대종교(유대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들이 민중을 지도하고 있는 본부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심장은 성전입니다. 구약에서 흘러 내려온 역사를 보더라도 이 성전은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역시 이 성전이 라는 것이 3년의 스토리를 흘러가게 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계셨다는 말은 이런 모든 상황 속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정치. 종교계 거물급들의 레이다망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갈릴리에 계셨다는 것은 조용한 홈 타운에서 민중을 상대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예수사건은 이 큰 두 지역적 특성을 먼저 밑그림으로 그려놓아야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어느 유월절 어간에 생긴 일인지를 알면 대충 공생애 1년경인지, 2년경인지, 3년경인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갈릴리에서인지 아니면 예루살렘 지경 즉 유대지방에서 된 일인지에 따라 활동의 성격을 구분할 수 있어서 이렇게 이 두 가지 요소로 포석을 해 두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예수님의 행적’ 도표에 (예) 사역, (갈)사역이라고 쓰여진 것을 눈여겨 보십시요.

사실 이 작업은 힘든 작업이어서 예수님에 대해 들은 얘기가 적은 분들, 그러니까 주일학교부터 교회에 다니시지 못하고 나이 드셔서 예수 믿으신 분들은 일단 스토리 자체를 잘 모르니까 이 방법대로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냥 마태복음 다 읽으면 마가복음 읽으시는 그런 방법으로 읽으십시오. 그러나 각각의 복음서는 다 사도행전과 얘기가 연결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