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91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하나님과 롤러코스터를..
롤러코스터를 타고,
야간 썰매장에 가고,
줄넘기를 하고,
캐치볼을 하고,
그네를 타고,
돌차기를 하고,
나무 타기를 해보세요...
다시 아이가 되어 보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을 만드셧다는 것을.
롤로코스터를 탈 때,
줄넘기를 할 때,
그네를 탈 때,
나무에 올라갈 때
그분께 감사드리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회개의 열매
진정한 회개에는 열매가 맺힙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깨끗이 해결할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게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면 그 일을 볼바르게 끝낼 때까지 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달라고 간구할 수 없습니다.
대전에 한 교외헤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잘 생긴 남자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왔는데, 그는 마음에 큰 걱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채무 불이행자입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레스토랑 주인의 돈을 훔쳤는데, 그것을 반환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돈을 다 썼습니까?" 그는 모두 다 쓰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즉 300만원을 훔쳤는데, 이작 180만원 정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돈으로 뭔가를 해서 다시 갚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벌 수는 없을까요?"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것은 사탄의 망상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에게 훔핀 돈으로 성공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시 돌려주고 주인에게 가서 긍휼과 용서를 구하도록 원했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저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제게 도움을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어떠한 도움을 구하기 전에 반드시 돈을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그가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 일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더 큰 실수는 처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있었습니다."
그의 짐은 너무나도 무거워서 지탱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나에게 200만원을 주면서 자기 주인에게 대신 되돌려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고용주와 내가 교회의 한 방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돈을 내어놓으면서 이것이 피고용자들 중의 한 명에게서 나온 돈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고용주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를 긍휼히 여거주기를 바란다늠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고용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용서합니다. 그래요. 그를 용서하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그래서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를 데리고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은 후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주셨고 축복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성령 충만과 완전한 순종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순종하기 어려운 것을 명령하실 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가요?
나. 하나님이 나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갑, 통장, 집문서 등은 모두 누구의 것입니까? 많은 성도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다 내놓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그것을 빼앗아 가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장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은 까다로운 하나님, 인색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까다로우신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인색하신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어려운 일을 주시나?'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순종이 두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락 없이도 모든 것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나 건강, 재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의 동의가 없이도 이것들을 가져가실 수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마음대로 못하시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만큼은 우리가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 마음조차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셨으며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죄짓지 않고 싶도록 만들어 놓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게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게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1, 2).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데려가실 것이면 그냥 데려가시지 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순종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순종이 부담스럽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마음에 마귀의 지배를 우리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면 우리 마음은 진공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마귀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가 우리 마음을 휘젓고 다니며 염려, 두려움, 낙심, 은밀한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의 왕이십니다. 저는 예수님께만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완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니모가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생각해 보세요. 결혼서약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서로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고 그 약속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서로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순종을 약속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왜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프로포즈 할 때에는 그렇게 두려워하지요? 완전한 순종의 축복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그 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이라"(요한복음 15:5). 완전한 순종은 예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내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면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기븜, 사랑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은혜의 강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신학대학원 공부를 병행할 무렵 학업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바쁜 사역 여건 속에서도 여러분의 배려로 마지막 논문 학기 등록만 남겨 둔 시점에서 저는 논문도 잘 쓰고 사역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상치 못한 말씀을 주셧습니다. "네 대학원 석사 학위를 나에게 바칠 수 있겠느냐?"
저는 너무 당황스러워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공부하는 것이나 하구이가 아무 소용없다고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제 마음에 학위가 차지하는 비중의 문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자랑하며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만큼 우선순위가 높아진 학위 문제를 하나님께서 정확히 지적하신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도무지 마음에 결단에 서지 않았습니다. 몇몇 선배 목회자들에게 이 일을 상담했습니다. 대부분 지나친 생각이니 신경 쓰지 말고 남은 한 학기를 마저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선니냐, 너의 자랑이 우선이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는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토요일 등록 마감인데 금요일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민이 되었는지 몸살이 나서 열이 펄펄 오르고 자리에 몸져누워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왜 그렇게 않는지 그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누워서 끙끙 앓다가 철야기도회 시간이 되어 혼자서라도 기도는 해야지 하고 일어나 이불 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주님과 싸우고 있었고, 저 자신과 맹렬히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입을 열어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석사확위를 ...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이불 위에 엎드려서 정말 서럽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아직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죽음을 경험한 것 같았습니다. 제 삶의 미래가 모조리 죽고 주님이 아주 오래 전부터 품어 온 소중한 꿈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큰 교회를 담임하고 싶다는 꿈은 버려야 합니다. 요즘 세상에 박사는커녕 석사 학위조차 없는 사람을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겠습니까? 가방 끈 짧은 목사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감수해야 합니다. 제가 그런 일에 얼마나 연연하며 살아왔는지, 저는 그날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울고 나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열이 다 내렸고 몸에서 힘이 났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잘했다. 참 잘햇다."하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서 자퇴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그간 학업을 핑계로 소홀했던 심방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습니다. 예정대로라면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산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부산제일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은 것입니다. 학부 졸업에, 나이도 어린 목사는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 내세울 조건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 후 안상관림교회의 청빙 역시 저의 학력은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2003년 선한목자교회에 부임할 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어떤 것을 명령을 하실지라도 순종하겠습니까? 이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도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해 보세요. 그리고 그 고백 뒤에 오는 성령의 감동을 체험해 보세요.
"아빠 아버지, 나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립니다.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주께서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어떤 것을 명령하실지라도 순종하겠습니다. 나의 고백이 실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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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영성이 이끄는 찬양
지금부터는 찬양의 기본인 영성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 영으로 찬송해야 합니다. 진정한 영성이 찬양의 기본입니다. 영성이 결여되면 그냥 노래이고, 영성이 갖추어지면 찬송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스미디어의 발전과 포스트 모던이즘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독교 음악도 이젠 그 빛을 드러내며 해가 갈수록 수많은 창작곡과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음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교회와 예배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문화의 다양성을 조금씩 인정하면서 기독교 문화의 발 빠른 도약으로 눈에 보이도록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찬양문화는 한국교회 예배의 한 기준을 세우며 많은 찬양 사역자들이 헌신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렇게 홍수처럼 범람하는 찬양의 물결 속에 진정한 영성이 살아있는 찬양을 만들고, 또한 영성 있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를 리더 하는 예배인도자나 CCM 사역자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예배 현장에 서있지만 진정한 영성이 이끄는 예배인도와 찬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아니 규칙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현실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사역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역을 위한 찬양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인가?’하는 유치하지만 솔직한 질문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에 대한 깊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본 구절에서 ‘몸’은 물질로 구성되어진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생각, 삶과 가치관, 관계와 사역 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뛰어난 실력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제사(예물)로 드려질 거룩한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우리를 상당한 착각 속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자의 순수한 찬양 자체보다는 상품으로 포장된 그들만의 브랜드로 사역자들의 값을 평가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장비로 음악을 만들었느냐, 실력 있는 연주가의 반주와 리코딩을 사용하였느냐가 찬양 사역자들의 수준과 값어치를 정해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역을 위한 테크닉 보다 영성을 살려야합니다. 물론 세상문화와의 경쟁력을 갖추려면 그들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 좋은 음향장비와 사역자의 테크닉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자로서, 실력이나 테크닉이 이끄는 찬양은 예배의 본질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겸손히 무릎 꿇는 기도와 영성으로 찬양문화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저는 찬양사역 자로서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사도행전 16장의 빌립보 옥중에서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를 생각합니다(행 16:25-34). 이들은 캄캄한 옥중에서 손과 발이 묶여있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하였고, 이 때 홀연히 큰 지진과 함께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린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을 일으킨 단초는 화려한 무대 위에 설치된 조명과 고가의 음향장비 그리고 찬양의 테크닉이 아닌 그들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성이 이끄는 찬양과 기도로 그곳에 준비된 영혼인 간수와 그 집을 구원하는 결실을 낳았습니다.
요즘 기독교방송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언론, 단체에서 역량 있는 신인 사역자 발굴을 위한 각종 대회들을 열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내 찬양문화를 이끌고 온 많은 사역자들이 바로 이런 대회들을 통해 발굴되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대회를 통해 찬양사역을 시작하는 분들이나 현재 현장에서 사역하는 동역 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 가 있습니다. 바로 화려한 상품으로 포장된 노래는 흘러가는 유행가처럼 늘 새로운 노래만을 추구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영성의 옷을 입고 외치는 찬송은 부르면 다시 부르고 싶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할 것이고, 보고도 또 보고 싶은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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