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의집 1288번째 이야기
예림의집 이야기하나님과 대화하는 101가지 방법...
3자간 대화
당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해답을 얻지 못한
영원한 문제에 대해서도
친구와 얘기해 보세요.
당신이 진실로 믿고 있는 것,
창조,
하나님의 의지,
선과 악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해 보세요.
당신의 친구도
자신의 문제를 말하게 하세요.
함게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끝내세요.
두 사람의 우정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세요.
예림의집 칼럼™예림의집이 드리는 삶의 지혜...
회심(마음을 돌이킴)
저희 <예림의집카페> 회원분 중에 제천에서 개척교회를 이끄시는 목사님 중 한 분이 얼마 전 자신의 회심에 대해 적은 편지를 내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편지에는 즉각적인 결심에 대한 부분이 힘주어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이 나에게 참으로 도전이 되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함께 읽고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9살 때 예수를 믿지 않았던 나는 서울에서 기독교인 변호사 밑에서 법관이 되기 위하여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외출한 어느 날 오후 내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의 아내가 '오늘 저녁 성경공부 모임에 함께 가시겠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시면 나의 남편이 멀리 나갔을 때에도 당신이 가족 예배를 인도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예, 하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 집에 갔을 때 그녀는 내가 했던 말을 책임질 수 있는지 물어보더군요. 구래서 '네, 함께 모임에 나가는 것만이라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인과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열 두어 명의 사람들이 작은 학원 건물에 모여 있더군요. 인도자는 나와 다른 두 사람을 제외하고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그래서 인도자가 내 옆 사람에게 말할 때 나는 그가 내게도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나는 속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전에 언젠가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었지. 지금 실행에 옮기는 건 어때?'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 지 1분도 채 안되어 그분은 내게 친절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분은 나릉 잘 알고 계신듯 말했습니다. '형제님,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래서 나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어요. '네, 선생님, 저는 방금 결심했습니다. 30초 전에요. 저는 기독교인으로의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그때 저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고, 입으로 그 결심을 말했던 것입니다.
내 단호함에 그분은 순간 멈칫했습니다. 나는 그분이 내 진심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별다른 말을 안하고는 다른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들과 몇 마디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뒤 그분은 나에게 다시 말슴을 하셨죠. '형제님, 기도로 이 모임을 마쳐주시겠습니까?
그분은 내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난 아무 느낌도 없었어요. 순전히 업무적인 딱딱한 일로 여겼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기도할 줄 몰라. 그에게 양해를 구해야지.' 또 다른 생각이 뒤를 이었습니다. '난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하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이것은 그 일부야.' 그래서 나는 '기도합시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내가 무릎을 굽혀 마룻바닥 위에 꿇을 때까지의 시간 동안 어디에선가 주님은 내 영혼을 뒤바꾸어 놓는 일을 하셨습니다. 내 기도의 첫 마디는 이것이었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말 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상관이 없겠지요. 내 마음이 너무나 충만해서 '영광' 이라는 말 박에는 할 말이 없었으니까요/ 그 시간부터 사탄은 나의 회심에 대해 감히 도전하질 못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게 돌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확하게 표현은 못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몰래 다가올 어떤 기적 같은 느낌을 기다라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떤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항상 한 가지 대답만 했습니다. 지난 5년동안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려고 노력할 때만다 그는 매번 "아직 마음에 강렬한 느낌이 오질 않아요."라는 말만 반복했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무엇이 당신의 마음에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느낌이 올 때까지 기독교인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그 느낌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시는 관점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아니요, 저는 제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물론 알죠. 하지만 그게 아직 내 마음으로 강렬히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물러섰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런 우유부단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은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주셨지만, 또한 그의 마지막 5년 동안 저를 통해 복음을 듣게 하셨지만, 그가 그 세월의 끄트머리에 한 말은 "마음에서 강렬히 느껴지지 안하요."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오늘의 QT매일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성령의 능력에 대한 약속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부어 주실 성령의 역사를 두 가지 물로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 14).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샘물을 마시고 소생하듯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속죄의 은총을 받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샘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 곧 생명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생명의 역사가 분명하게 일어났습니까? 어던 증거가 있습니까? 저는 요즘 예수님 생각, 말씀 생각이 보다 많이 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특히 부정적인 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살게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한복음 7:37, 38).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강에 비유하셨습니다. '샘물'과 '강'은 물이라는 면에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량과 역사하는 차원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시원한 샘물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강은 동, 식물과 바다가지 소생시키고 도시의 사람들이 필요한 물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큰 강이 있는 곳에는 도시가 서고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에 대하여 말씀하신 뜻은 강 같은 은혜의 역사 곧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도시가 소생하고 민족이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새해 교회 표어를 정하기 위해 기도원을 찾아가 기도하는데 요한복음 7장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표어를 "하나님의 은혜가 강강히 흐르는 교회"라고 정하고 너무 좋아서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큰 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우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웃지나 않을까? 교회의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일들도 해결하지 못하고 허덕이면서 표어만 거창하게 세워 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서 무거운 망므으로 교회로 돌아오는데, 차 안에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깨닫게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가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제자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온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했고, 로마를 변화시키켜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인들이 120명보다 적은가? 초대교회 교인들은 우리보다 더 능력이 많았을까?"
예배당 건물만 놓고 보아도 마가 다락방보다는 큰 것이 분명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차를 멈추고 "주여, 저의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왜 자꾸 너 자신을 보며 작다고 하느냐?"라는 책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시와 민족의 문제가 나와 교회를 통하여 해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받을 때 능력을 받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생명을 얻는 것이 능력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얻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만 있고 능력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것조차 주저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무언가 부자유할 것 같고 불이익을 당할것 같고, 논쟁에 휩싸일 것 같고, 너무 튀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한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어느 성도가 한동안 직장 식당에서 식사기도를 할 자신이 없어서 점심식사 전에 화장실에서 감사기도 하고 식사를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비판이 의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 없이는 식사기도조차 제대로 못하고 삽니다.
복음서의 저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같은 사람들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고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하면 어떤 능력이 생길까요?
1. 성령 충만을 받으면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①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5:18).
②마귀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10:38).
③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6:33).
④자아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갈라디아서 2:20).
2. 성령 충만을 받으면 새로운 능력이 부어집니다.
①믿음에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생깁니다(로마서 8:38, 39).
②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사도행전 4:31).
③기도의 능력을 받습니다(고린도전서 14:15).
④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사도행전 7:55-60).
⑤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봉사할 능력을 얻게 됩니다(고린도전서 12:6-11).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마음이 새 힘을 얻습니다. 새로운 삶과 비전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집니다. 자아를 추구하던 삶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랑하고 연합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기고, 복음 증거의 능력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복음 전파의 문이 열려 교회 공동체가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인 1907년, 한국 교회는 영적으로 황폐하였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한국 교회를 순회하고 돌아온 날은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도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았고, 성적으로 방종했습니다. 또한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어떤 집회소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당굿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교인들까지 다툼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이들에게 성찬을 금했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제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달라졌습니다. 사이가 나빴던 선교사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를 미워한 것을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교인들 중에 며느리를 미워했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시어머니를 미워했던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돈을 빌려 가서 갚아 주지 않고 있던 사람이 당장 돈을 마련하여 빌린 돈을 돌려주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로만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아빠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나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나는 정말 무능하고 무익한 죄인입니다.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살게 하소서.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 안의 주인 되시어. 나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양의 향기악보를 클릭하면 찬양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찬양 세미나 강의입니다...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지금까지 차분히 제 글을 읽어왔다면, 찬송을 단순히 신앙인의 정서를 위한 노래 정도로 알고 있었던 분들에게는 제 이야기가 아마 큰 충격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제 강의를 듣는 사람 중에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 번째는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찬양을 대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반면 아예 입을 열지도 않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제대로 여러분의 마음에 뿌려졌다는 징표인데, 그로 인해 영적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찬송에 대한 인식이 매우 새로워 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제는 찬송하기가 약간 겁도 날 것이고, 한 편으로 한 가지 매우 큰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이 생긴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제 이야기를 듣고 이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이 글을 쓰게 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발 똑바로 알고 똑바로 나를 찬양하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글에 심으신 뜻입니다. 찬송을 새롭게 알게 된 여러분에게 찬송하는 방법을 궁금하게 여기도록 하신 분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부터는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찬송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 저에게도 동일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송하는 것이 좋을까…?" 그래서 어느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찬송은 어떻게 불러야 하지요?" "네, 배에다 힘을 주고 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부르십시오." 저의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잘 아는 교회음악과 교수님에게 다시 자문을 구했습니다. "교수님 어떻게 하면 찬송을 찬송답게 할 수 있을까요?" "어깨와 턱의 힘을 빼고 입을 타원형으로 벌려서…." 목사님과 교회음악과 교수님의 대답을 들으면서 저는 식성에 전혀 맞지 않은 반찬 때문에 식사 시간마다 곤욕을 겪어야 했던 지난 하숙생활이 떠올랐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있을 텐데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분들의 입에서 전혀 엉뚱한 대답만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 방법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수많은 밤을 새웠습니다. 어디서, 누군가에게 배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성경보고를 끝도 없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흔히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을 위해 한다는 말을 아주 쉽게 그리고 자주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방법을 하나님께 묻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지 않습니다. 때문에 목적은 좋은데 과정이 좋지 않고 그 열매 또한 엉뚱한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 말씀을 매일매일 묵상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이 내 삶의 가늠자가 되고 때로는 브레이크가 되어 범사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고 세속의 유혹을 단절시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모든 사역을 준비할 때에 항상 아버지께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찬송으로서 가치가 있습니까? 이번 집회 때 이 곡으로 찬송하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기뻐하실까요?"
왜냐하면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 한 일이 주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찬송이 그분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결과로 끝난다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찬송하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그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제가 겪었던 찬양사역의 함정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 가야할 단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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